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병사 봉급인상도 중요하지만 이 광경부터 봐야
    쓴 기사/기고 2017. 7. 4. 22:26

    http://www.ohmynews.com/NWS_Web/View/at_pg.aspx?CNTN_CD=A0002326479

     

    [24개월 병영 기록 ①] 입대 그리고 공군훈련소에서의 6주

    [오마이뉴스고동완 기자]

    2015년 5월 18일부터 2017년 5월 17일까지.

    지난 군 생활 2년, 안팎으로 많은 일들이 있었다. 바깥은 5월부터 메르스(MERS)에다 8월엔 목함 지뢰 사건이 벌어지더니 이듬해 4.13 총선에선 원내 1당의 지위를 더불어민주당이 차지하면서 정국이 요동쳤다. 위안부 합의와 국정 교과서 강행 등 박근혜 정권의 일방통행식 실정이 계속되고, 비선 최순실의 국정농단이 드러나면서 시민들의 분노는 촛불집회 참석 인원, 연 1600만 명이라는 경이로운 수치로 분출됐다. 헌정 사상 첫 탄핵 대통령의 오명을 쓴 박 대통령은 구속되고, 조기 대선이 치러졌다.

    5당 대선 후보들은 병사 처우에 관한 공약을 쏟아냈다. 당시 문재인 더불어민주당 후보는 병사 봉급을 2020년까지 70만 원 수준으로 올리겠다고 공약했다. 대선 출사표를 던졌던 바른정당 남경필 경기도지사도 경선을 앞두고 "최저임금 대비 14%에 불과한 사병 급여를 22년까지 50% 수준으로 인상하고, 23년 이후 모병제로 전환하자"라고 주장해 병사 처우 개선은 물론, 모병제의 군불을 지폈다. 다른 후보들도 '애국 페이'를 비판하며 병사 봉급 인상을 공약하거나 돈 더 받는 간부 비율을 높여 군을 전문화하겠다고 약속했다.

     대선 당시 5당 후보의 병사 복지 개선에 관한 주요 공약표
    ⓒ 고동완

    병사의 처우를 개선하자는 데에는 좌우 막론하고 이견이 없었지만, 5당 모두 이를 월급 인상과 봉급을 적게 받는 병사 비율을 낮추는 정도로 문제를 환원해 해법을 모색하는 경향이 있었다. 9년 만에 정권 교체가 된 지금, 문재인 대통령의 대선 공약도 봉급 인상에 역점을 뒀다. 그런데 봉급 인상이 이뤄진다고 해서 병사의 병영 속 생활상이 얼마나 개선될 수 있을까?

    해법을 일원화하면 다양한 사례에서 발굴되는 문제를 간과하기 쉽다. 그렇게 보면 봉급 인상이 우선 과제라도 전부가 될 수는 없다. 월급 인상은 중요하지만 개선할 여지가 많은 병사의 생활상을 확 변모시킬 수 없기 때문이다. 결국 현장이 어떤지 밖으로 끄집어내야 보안을 중시하는 '군'의 굴레를 넘어 생활상을 조망할 수 있다. 이 때문에 지난 2년간 병사로서 군에서 직접 보고 겪은 많은 것들을 묵히지 말고 기록해야겠다는 확신이 섰다. 그 기록은 병사의 생활상이자 잠복해왔던 문제의 실마리를 제공할 것이다.

    군인 신분으로는 하고 싶은 말이 있어도 꾹꾹 눌러 담을 수밖에 없었다. 언론에 노출되는 것도 사전 허가가 뒤따르며, 주장도 함부로 공표할 수 없기 때문이다. 지난 17일을 끝으로 민간인으로 돌아간 입장에서, 입대 당일인 2015년 5월 18일로 시곗바늘을 돌려 그간의 빗장을 풀려고 한다.

    1990년대 병영 환경... 병역 관리는 '첨단'

    2015년 5월 18일 입대일, 진주에는 비가 추적추적 내렸다. 필자는 752기로 공군에 입대했다. 공군에 입대하는 병사들은 빠짐없이 6주간 진주에 위치한 교육사령부 훈련소를 거쳐야 한다. 시간이 다가오자 필자도, 입대 장병들도 스탠드석에 가족을 두고 비를 피해 대형 천막, '전천후장'에 들어가야 했다. 입대 장병들 얼굴을 훑었다. 일부는 눈가가 촉촉하고, 누구는 가족이 있는 곳을 뚜렷이 주시했다. 그러다 천막이 가려지고, 가족들 모습을 더는 볼 수 없었다. 그렇게 외부와 단절됐다.

     15년 5월 18일 입대 당시 훈련소 입소 전 찍은 사진. 입소를 기다리고 있는 장병과 그 가족들이 보인다. 비가 왔기 때문에 스탠드석이나 전천후장(대형 천막)에서 대기해야 했다.
    ⓒ 고동완

    조교는 구역을 나눠 입대 장병들을 집합시킨 뒤, 어느 대대로 배정 받는지 알려줬다. A대대(대대명은 가명)로 가는 장병들은 내심 흐뭇한 미소를, B대대로 배정받은 장병 입술은 일그러졌고 욕설이 뒤따랐다. 나는 B대대로 가게 됐는데, 그땐 이유를 몰랐다.

    병무청 직원들이 신원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병무청에서 신체검사를 받을 때 발급받은 '나라사랑카드'를 바코드에 찍더니 신원이 확인되고 입대 장병으로 등록됐다. 내 기록이 온전히 담긴 카드가 나의 과거, 더불어 앞으로의 미래까지 바코드에 담기게 되면서 관리가 계속될 것임을 직감했다. 조금은 섬뜩했다. 병역 관리만큼은 첨단이었다. 훈련소 신체검사 때도, 예방 접종 이후에도 카드가 사용됐다.

    배정받은 B대대의 내무반 풍경은 영화나 드라마를 통해 보던 1980, 1990년대 병영이었다. 공군은 모든 생활관을 2010년대 1인 1침대, 현대식으로 전환했다고 해왔지만, 훈련소는 예외였다. 좌우 사이를 두고 길게 늘어선 장판에, 벽면에 속이 그대로 노출된 녹슨 관물함이 한 사람 생활할 공간을 구획했다. 그렇게 1인당 공간 크기는 옆 사람과 부대끼지 않고 누울 정도였다(이 같은 시설이 병사들 건강을 얼마나 위협할 수 있는지는 다음 기사에서 다룰 예정이다).

    B대대로 배정받은 장병들이 왜 탄식을 했는지 주변에서 흘러나오는 얘기들을 종합해보니 이제야 알 수 있었다. A대대가 비교적 최근에 지어진 건물이라 시설이 좋다는 것이다. 물론 거기도 내무반의 기본 구조는 옛날 병영이었다. 한 내무반엔 수십 명이 들어가서 지내야 했는데, 자리는 복도 쪽 문가에 배정됐다. 필자 이름이 기역으로 시작하는 터라 소대에서 순번이 2번으로 정해졌고, 문 바깥에서 노출되기 쉬운 곳에 꼼짝없이 배정됐다.

     12년도 훈련소 내무반 풍경. 3년이 지난 15년도 입대 당시만 해도 내무반 모습은 저 풍경 그대로였다. 일부 대대는 노후 시설을 뒤로 하고 신축을 통해 내무반이 한결 깨끗해졌지만 기본 구조는 종전 내무반과 유사하다.
    ⓒ 공군 공감

    화장실은 벌써부터 전쟁이었다. 한 층에 수백여 명이 지내는데, 대형 화장실 하나만 있었다. 취침 전에 자기 정리 시간이 주어지면 볼일을 보려는 장병들로 북새통을 이뤘다. 이런 광경들은 '훈련병이라면 시설의 불편 정도는 감수해야 한다'는 군의 밑바닥 정서가 투영된 결과가 아니었을까.

    억압의 배출구 '낙서'... '~요' 사용은 철저히 금지

    화장실 변기칸 벽면을 쳐다보니 사방엔 말 못할 애환이 적혀있었다. 수시로 조교로부터 통제를 받는 상황인데, 힘들지언정 내색하긴 어려우니 속에 담긴 것들을 그나마 아늑한(?) 변기칸 벽면에다 표출한 것이다.

    거기엔 얼차려를 많이 주는 특정 조교를 조심하라는 노골적인 험담부터 선임 기수로 보이는 누군가가 훈련소 수료를 앞두고, 앞으로 입대할 장병을 위해 적어놓은 팁까지 다양했다. 이를테면 방독면 훈련 때 덜 고통 받는 법 같은 것들이 적혀 있었다. 심술궂게도 읽는 사람 골탕 먹이려고, 그대로 실천했다간 고달파지는 내용을 적어놓기도 했다. 팁을 위장한 낙서인 것이다.

    낙서는 강당 의자, 내무반 책상과 이론 교재에 이르기까지, 조교 눈을 피해 장병들의 손길이 닿을 수 있는 곳 어디에나 있었다. 낙서의 주된 내용은 빨리 수료해서 속히 훈련소를 벗어나고 싶다는 염원, 앞으로 입대할 장병들에게 불쌍하다고 동정 의식을 내보이는 글들이었다.

    덕지덕지 있던 낙서는 훈련소를 벗어나더니 자유가 주어지기 시작하는 특기학교에서, 자대에서는 눈에 보이지 않았다. 낙서가 억압된 자유의 배출구 노릇을 한 것이었다.

    군에선 '어서오세요'와 같은, 익숙한 '~요'의 사용이 철저하게 금지됐다. 입소하고서 처음으로 경고 받은 게 '~요'의 사용이었다. 무심코 '~요'라도 입 밖에서 나올 찰나, 조교로부터 한소리 듣거나 얼차려를 받기 일쑤였다. 말끝마다 '했습니까'식의 '~까'를 붙여야만 했다. 말 하나할 때마다 격식에 어긋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하는 게 군대였다.

     16년 2월부터 국방부는 '다, 나, 까' 대신 '~요'의 사용을 허용했지만 이를 지키는 경우는 드물다.
    YTN 방송 내용 캡처

    2016년도부터는 국방부가 나서서 '~까'뿐 아니라 '~요'도 사용하라는 개선안을 일선 부대에 보냈다. 하지만, 길게 이어져온 언어 사용의 악습은 관습이 돼 잘 고쳐지지 않았다. 훈련소에서 '~까'를 강제로 입에 달게 된 뒤, 자대에 가끔 출입하는 민간인에게도 '안녕하세요'가 아닌 '안녕하십니까'를 쓰는 게 습관이 됐다. 자대에서도 병사들 간에서 조차 '~요'를 쓰는 경우를 찾아보기 드물었다. 결국 휴가 나가서도 한동안 '~요'가 입에 떨어지지 않았다.

    훈련소의 언어 교육이 시간에 따라 다져지는 언어 습관을 단기간에 좌우했던 것이다. 언어 습관을 바로 잡으려면 일선 부대에 지침을 내리기에 앞서, 훈련소에서의 언어 교육이 어떻게 이뤄지고 있는지를 우선 살펴봐야 하지 않을까.

    "필!…" 때문에 냉랭해진 입단식... "고개 과장되게"

    입대 6일 차, 입단식을 앞두고 '이행 연습'을 했다. 공군은 입대식과는 별도로 1주일의 기간을 두고 신체 및 정신 검사를 통과한 사람만 정식으로 입단시킨다. 연습할 때 드러난 가장 큰 난관은 국기에 경례할 때 '필승' 구호를 하지 않고 경례만 해야 한다는 것.

    국기에 경례를 하기에 앞서 '국기에 대한 경례!' 구령이 지휘자를 통해 울려 퍼지는데, '경례'란 말에 주목한 나머지, 국기에 "필승"을 외치는 장병들이 거듭 속출했다. 입단식을 위해 동시에 집합한 수백여 입단 장병들이 "필승" 소리가 안 나오도록 행동을 통일해야만 했는데, 조교들로부터 혼나고, 또 혼나고 난 뒤에야 "필승" 소리가 안 나왔다.

    이것 말고도 다른 데 바라보다 대대장 훈시가 시작되면 고개를 과장되게 돌려 대대장을 주목해야 한다는 것도 난관이었다. 처음에 어느 정도의 세기로 고개를 움직여야 하는지 감이 잘 안 왔다. 누군가 고개를 느슨하게 움직이면 지목받아 혼나기 일쑤였다. 절도가 있으면서 순식간에 고개를 대대장에게 돌려야 합격점이었다. 지금 돌이켜보면 약간의 헛웃음이 나오는데 당시 군에선 이를 군기의 척도로 삼는 것 같았다.

    다음날, 긴장감이 감도는 가운데 입단식 시작. 소대장이 입단식에서 실수가 있으면 혹독한 동기 부여가 있을 거라고 예고한 마당이었다. 강당에 대대장이 입장했다. 진정 연습이 아닌 실전에 돌입한 것이었다. 입단식 초반부, 국민의례가 울려 퍼지고 문제의 그 경례가 시작됐다.

    "국기에 대한 경례!"
    "필!…"

    순간 분위기가 급랭했다. 어디에선가 입 밖으로 나온 "필!"로, 예고가 현실이 되고 말았던 것이다. 침묵 속에 대대장의 상투적인 훈시가 끝나고, 입단식이 마무리되자 바로 점호장에 집합해야 했다.

    입단식 초반부를 망친 대가는 컸다. 팔굽혀펴기와 PT 체조가 반복됐다. PT 체조할 때 바지가 계속 흘러내려 어찌나 곤란하던지. 한 손은 흘러내리는 바지를 쥐어 잡고, 한 손만 체조 구령에 맞춰 허공에 흔들어댔다. 훈련 기간엔 더럽혀질 염려가 많다 보니 한참 쓰다가 오래된 전투복을 입는데, 맞는 치수의 바지가 남지 않았기 때문에 당장은 입을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 다음 기사에 계속됩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