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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입체적인 누아르 <불한당>, 왜 팬들은 이 영화를 놓지 못하나 (6.13)
    생각/영화 2017. 8. 7. 10:57

    [리뷰] 논란 이후 뒷심 발휘에 나선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33543


    [오마이뉴스 글:고동완, 편집:곽우신]

    *주의! 이 기사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누아르 영화의 백미라고 할 수 있는 부분은 단순한 선악 구도를 넘은 '악대악' 구도다. 대개 누아르에선 선이 악을 제압하지 않는다. 선처럼 보이던 것이 악의 탈을 쓰고 악을 향해 나선다. 악을 찾으려 누군가를 살육하는 그 순간, 그 사람의 인생을 앗아간다는 점에서 그것을 오롯이 선이라고 칭할 순 없을 것이다. 혹은 악에 몸담은 상황에서 악을 제압한다고 선으로 변모하는 것도 아닐 것이다.

    그런데 영화 <불한당: 나쁜 놈들의 세상>은 '악대악' 구조를 조폭과 조폭의 싸움이 아닌 조폭과 경찰로 만들었다. '민중의 지팡이'를 자임하는 경찰을 악의 구도에 넣은 것이다.

    경찰에서 비밀리에 꾸려진 '어느 조직'은 마약 범죄 조직을 소탕하기 위해 '악'도 마다하지 않는다. 경찰청 팀장 인숙(전혜진 역)은 경찰관 현수(임시완 역)의 삶을 약점으로 꼬드기고 철저히 활용하면서 범인을 잡으려고 한다. 한 사람의 인생을 생사 모를 어딘가의 미끼로 던진다는 점에서, 경중이 다를 뿐 죄를 죄로써 잡겠다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평면성을 덜어낸 영화... '믿음'을 찾아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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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J엔터테인먼트


    그리하여 영화는 권선징악적 이분법 구도를 가져가지 않으면서, 관객이 마약을 소탕하려는 경찰관에게 호의가 쏠리지 않고 상황을 다층적으로 바라보도록 해준다. 이 구도 위에 영화의 물음이 시작된다.

    누아르 영화에서 '믿음'은 빠질 수 없는 요소다. 뒤통수를 맞고 혹은 맞는 사람을 보고 누군가를 의심하게 되고, 결국 죽이고, 다시 다른 누군가를 의심해서 죽이는 과정이 연거푸 반복되곤 한다.

    영화는 믿음과 배신으로 점철된 누아르 영화의 속성을 따라가면서도 믿음이란 물음을 구체화해 집요하게 끌고 간다. 죽음이 또 다른 죽음 부르는 과정에서 재호(설경구 역)는 의심이 가거나 대드는 이는 모두 절멸해버리겠다는 서슬 퍼런 의지를 드러내 보이지만, 막상 믿음의 물음 앞에선 나름의 고민을 거듭한다.

    믿었다가 죽을 위기에 처하기도 했던 재호는 현수에게 "사람을 믿지 말고 상황을 믿으라"고 말했지만 정작 자기 자신도 갈피를 못 잡는다. 상황 안에 사람이 있기 마련이고 상황을 믿는다는 것이 사람을 믿는다는 말도 되기 때문에 상황만 믿으라는 말은 어폐가 있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극 중 인물들이 믿음을 놓고 겪는 상황은 우리가 마주한 혼란의 숲이자 현실을 적확하게 보여주는 단면이라고 할 수 있다. 믿음이란 칼로 과일 자르듯이 명쾌하게 단정을 내리고 분석될 수 있는 게 아닐 것이다. 그러나 사람과 사람 사이에서 믿음은 불가결한 요소이고 믿음에 회의가 생겨버리면 생각으로 침잠하는 숙명을 가진 게 인간이다. 

    누아르 영화 <불한당>의 역설적 뉘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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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J엔터테인먼트


    사람을 믿지 말라던 재호 역시 이권을 두고 벌이는 갈등에서 배신을 겪고 믿음에 회의한다. 그러나 재호와 현수가 믿음이란 공통의 고리를 얕게나마 잠시 형성해나갈 수 있었던 건 그 기저에 현수의 진정성이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이권과 실리 같은 장막을 쳐내고 본연의 진심을 드러내 보일 때 믿음이 맺어질 수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진심을 보이면 자칫 목숨이 달아나는 재호가 깊숙이 진심을 숨기고 만 뒤 누구도 믿지 못하게 된 것만 봐도 그렇다.

    영화는 현수를 그려내면서 목적을 위해 수단을 정당화할 수 없다는 명제를 분명히 한다. 삶을 황폐화 만드는 마약을 솎아내려고 그것도 의도적으로 어느 한 개인의 삶을 동원한다면 이를 공리적인 잣대로 정당화할 수 있을 것인가. 그렇다면 다수를 위해선 각자의 삶은 어떻게 되어도 좋다는 발상과 무엇이 다른가.

    피가 흥건하게 튀기면서 영화는 진행되지만, 역설적이게도 공리적 입장을 반박하듯 한 개인의 삶이라도 소중하다는 뉘앙스를 전달한다. 그것이 영화가 말하고자 하는 궁극의 메시지가 아니었을까.

    영화는 칸 영화제에 초청되고 이목을 받았지만 감독의 트위터 발언 논란이 불거지더니 관객 수 100만에도 미치지 못하며 순항하지는 못했다. 이에 낮은 전문가 평점도 더해져 영화를 찾는 발걸음이 크게 줄어든 것으로 해석되지만, '불한당을 살리자'는 움직임을 볼 때 불씨는 한동안 사그라지지 않을 것으로 보인다. 영화를 통해 믿음이란 일상의 물음, 그리고 사람을 되물어볼 수 있다는 점에서 단순 싸움이 난무하는 영화로 평가절하 할 순 없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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