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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광수 감독 연구(9) 두 편의 실험작, <빤스 벗고 덤벼라>와 <얼굴값>
    생각/영화 2020. 5. 6. 17:25

      빤스 벗고 덤비라니, 제목부터 도발적이다. 오프닝부터 남녀가 관계를 나누는 장면의 흑백 사진이 연거푸 나오는데, 박광수의 전작들을 종합하면 이 역시 도발적이다. <이재수의 난> 이후 잠시 영화 제작 곁을 떠나 부산영상위원회 초대위원장을 맡고 한국예술종합학교영상원에 출강하면서 바삐 보내던 박광수가 내놓은 신작이다. 전주국제영화제 디지털 프로젝트의 일환으로 <빤스 밧고 덤벼라> 제작에 나선 박광수는 영화의 모티브를 과거 경험에서 따왔다. <그 섬에 가고 싶다> 촬영 중, 에로배우로 이름을 날리던 안소영씨가 벗는 장면에서 고민하는 걸 봤다고 한다. 당시 안소영시는 에로배우의 이미지에서 벗어나 진지한 연기자로 변신을 꿈꾸고 있었으나 여기서도 벗어야 한다는 게 고민이 됐나 보다. 허문영, 「디지털, 디지털, 레볼루션 [2]」, 씨네21, 2000.03.21.

     


     박광수는 이를 흥미롭게 여기고, 시나리오를 집필하여 7년 만에 빛을 보게 된 것이다. <빤스 벗고 덤벼라>는 에로계 스타가 충무로에 진출하여 예술 영화에 출연해 연기에 매진하려 하나, 거기서도 벗어야 하는 상황에 맞닥뜨린 여배우(유선 역)가 당혹해하는 내용을 담았다. 하필 촬영해야 하는 장면이 정사 장면인데, 여배우의 흰색 팬티가 노출되면서 감독과 스탭들 눈엔 팬티가 거슬리자 이들은 팬티를 벗고 ‘공사’ 처리를 하여 촬영에 임해주기를 배우에게 요구한다. 이에 여배우는 다시 벗지 않겠다는 신념과 제작진의 요구 가운데 고심을 거듭한다는 내용이다.

     

      무엇보다 박광수의 ‘실험작’답게, 컷의 길이가 대폭 짧아졌다. 예산 5천만 원에 할당된 시간은 30분 남짓이라 실험의 길이가 그렇게 긴 것은 아니지만, 총 6대의 카메라 허문영, 「달라진 박광수 & 뉴 박광수 프로젝트 <방아쇠>」, 씨네21, 2002.04.20. 가 분절된 움직임으로 여배우와 제작 상황을 담았다. 박광수 영화라면 롱테이크라는 등식이 <빤스 벗고 덤벼라>에서 깨지는 순간이었다. 그러나 박광수의 주제 의식은 여전한 모습을 보인다. 영화에선 여배우가 사전에 정사 장면을 촬영하는 데 있어, 팬티를 벗는 것과 같은 얘기가 없었다고 제작진에 항의하지만, 제작진은 그 항의를 두루뭉술 넘기고 지체되고 있는 제작을 상기시키며 여배우의 결단을 요구한다. 이 내용은 박광수가 전부터 문제의식을 가졌던 내용이거나 문제의식을 포착하는 감을 통해 이것이 문제가 될 것이라 여긴 것 같다.

     

      최근 들어 불거진 ‘여배우 성폭력’ 문제도 이 같은 내용의 범주와 궤를 같이 한다. 특히 다른 것도 아니고 벗는 장면에 대해 사전에 조율되지 않은 내용을 제작에 들어가자 어쩔 수 없다는 태도로 요구하는 상황은 여배우의 인권을 얕게 본다는 인상을 지울 수 없다. <빤스 벗고 덤벼라>에서 여배우는 결국 팬티를 벗고 촬영에 임하지만 슬픔이 북받쳐 올라 결국 눈물을 흘리고 만다. 그 눈물을 닦아줄 사람은 곁에 없고, 뒷감당은 오롯이 여배우의 몫이 된다. 이러한 장면들은 박광수가 실험을 이어가면서도, 여배우의 인권 문제, 더 나아가 사람이라면 마땅히 향유해야 할 권리와 인권을 고민하는 흔적을 포기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겠다. 가벼워 보이면서도 속살은 가볍지 않은 영화를 <빤스 벗고 덤벼라>에서 만들어낸 셈이다.


      2003년에 가선 국가인권위원회가 제작한 옴니버스 영화 <여섯개의 시선> 제작에 참여하는데, 그 중 단편 <얼굴값>의 제작을 맡는다. <얼굴값>은 여성의 얼굴을 소재로 한 인권 영화다. 어느 날 아침, 숙취를 경험한 듯한 한 남자(지진희 역)가 장례식장 주차장에서 빠져나오던 찰나, 매표소의 한 점원(정애연 역) 얼굴을 본다. 남자는 여자 얼굴을 보다 기다리는 뒷차의 항의를 받고, 때 아닌 점원에게 표를 달라며 항의한다. 점원은 퉁명한 어조로 남자를 대하고, 남자는 이것이 애증인가 싶을 정도로 다시 차를 돌려 매표소로 향한다. 남자는 급기야 여자의 얼굴을 논하며, 이 얼굴 가지고 매표소일 하기엔 아까운 것 아니냐 등의 인권 유린성 발언을 내뱉는다. 

     

      그렇게 실랑이를 벌이다 남자는 결국 매표소를 떠나는데, 한 영정 사진을 보게 되고 그 사진이 아까의 그 여자임을 알게 된다. 박광수는 <얼굴값>에서 매표소와 매표소 바깥의 공간을 대비하며 여자와 남자의 대비를 비춘다. 여기서 마치 이승과 저승의 경계를 공간으로 나눈 것처럼 구도를 선보인다. 남자가 여자의 얼굴을 논하는 대목에선 얼굴의 생김새를 두고 무의식에 벌어지는 차별 의식을 일깨우며 반성을 촉구하는 듯한 느낌을 준다. 실생활에서 봤던 여성이 실상은 죽은 사람이라는 이야기는 박광수의 전작에서 좀처럼 보기 어려운 설정인데, 이 역시 실험이라면 실험일 것이다.
      

      사실 박광수는 <얼굴값>의 그러한 실험에 앞서, 비무장지대 병사와 처녀 귀신의 사랑 이야기를 그린 <방아쇠>를 2000년부터 본격 작업 중이었다. 「부산영화제 지원작 확정」, 매일경제, 2000.07.24. <방아쇠>의 주인공은 <얼굴값>의 지진희와 정애연으로 결정됐었다. 그러나 <방아쇠>는 캐스팅을 마쳤음에도 불구하고 자본 유치에 애를 먹게 된다. 김길남 길벗영화사 대표는 “투자자들이 방아쇠가 너무 무겁다고 해서 시나리오 수정 작업 중”이라며 “영화 투자가 코미디에 쏠리다보니 다른 소재가 외면을 받고 있다”고 밝혔다. 김희경, 「웃으면 ‘돈’이 와요? 한국영화 ‘코미디 천하’」, 동아일보, 2002.12.12.

     


     박광수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이재수의 난>과 함께 영화를 작업하던 기획시대와 손을 맞잡고 <방아쇠> 제작에 박차를 가했으나 결국 투자자를 모집하지 못하고 제작은 엎어지게 됐다. 기획시대는 2002년 10월경 울산 울주군에 <방아쇠>를 촬영하기 위해 실물크기 비무장지대 초소와 내무반, 족구장 등을 건립하고자 착공했으나 공사한 지 한 달도 되지 않아 중단됐다. 정재락, 「흉물로 변한 영화세트장…건립중단 뒤 1년 방치」, 동아일보, 2003.12.01.


     <이재수의 난> 이후 한국 영화계의 상황을 설명한대로, 영화 투자자에 입김을 맞추지 않고선 영화 제작이 어려운 시기가 도래했던 상황이었다. 박광수가 <이재수의 난>을 두고 이런 영화가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힌 것도 이런 연유에서였을 것이다. 그렇게 자의반, 타의반 박광수는 제작 환경을 잠시 떠날 수밖에 없었다. 물론 그 기간에 박광수는 부산영상위원회를 이끌며 한국 영화의 밑돌을 세우는 데 주저함이 없었고, 한국예술종합학교영상원 교수를 맡으며 후학 양성에도 힘썼다. 2000년 <빤스 벗고 덤벼라>는 영상원 제자들과 함께 제작한 영화였다. 그러다가 2007년 4월, <이재수의 난> 이후 만 8년 여만에 장편 영화를 내놓는데, <눈부신 날에>가 그것이다. 박광수 감독은 <이재수의 난>이 끝나고 관객과 사회가 영화를 바라보는 경향이 급변하던 시기, 변화를 한창 모색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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