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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마지막에 구슬을 꿰어야하는 건 본인이다”
    쓴 기사/학보사 2013. 10. 3. 01:22

    충남 예산 출생. 72년 본교 경영학과에 입학했으며 졸업 이후 일본 와세다대학교에서 석사, 본교에서 행정학 박사 학위를 받았다. <한국경제신문> 도쿄특파원을 거쳐 사회부장과 편집국장, 이사를 지내고 <한경매거진>, <시사저널> 대표이사, 우리학교 초빙교수를 역임했다. 현재 <이데일리> 대표이사로 재직 중이다.
    “입학했을 당시만 해도 1학년만 다니고 2학년 때 편입하는 학생이 상당히 많았다. 학년 정원이 60명 조금 넘었던 시절, 2학년이 되자 편입한 학생이 20명이 넘었다. 내가 좋아해서 선택한 대학인데 여기서 다른 곳으로 가는 건 실패라고 생각했다” 
    김형철 동문은 학창시절, 학업과 활동 면에서 적극성을 띄었던 학생이었다. 현재는 본교 출신 언론인 모임인 북악언우회 회장과 총동문회 상임위원을 역임하면서 우리학교에 애정을 쏟고 있다. 

    -우리학교에 오게 된
    배경이 있다고 들었다

    충남의 시골에서 고등학교를 쭉 다녔는데 그 당시엔 사범대를 많이 갔다. 나는 교직에 있긴 싫어 서울로 오게 됐다. 하지만 그 해 전기, 원하는 대학에 떨어졌고 바로 재수를 결정했는데 도서관에서 국민대 경영학과 선배를 만났다. 국민대를 잘 몰랐던 시절, 그 선배는 국민대가 임시정부에서 중대한 역할을 한 해공 신익희 선생이 만든 대학이라고 말해줬다. 그런데 고등학생 때부터 내가 깊이 평소 존경했던 분이 바로 신익희 선생이었다. 신익희 선생이 세운 학교에서 공부해야겠다는 마음으로 나는 국민대에 후기 원서를 넣었고 장학생으로 합격통보를 받았다.

    -대학 시절은 어떠했나
    선배 권유로 ‘청문회’라는 학술 동아리 활동을 했다. 그때는 한창 민족주의 노래가 유행하고 일본의 섹스관광이 문제 되고 있었던 시절인데, 청문회에서는 한 세대의 고민을 같이 하면서 국가의 사회적 문제를 주제로 세미나를 자주 했었다. 서갑원 전 국회의원과 정남기 현대모비스 부사장 등이 청문회 출신이다. 그러던 중 유신 체제가 선포되고, 흥사단의 아카데미즘 활동을 지금의 이태복 전 보건복지부 장관과 3학년 때부터 활동했다.
    지금 보면 서울 출신 학생이 대학 내에 주를 이루던 시절, 그 학생들은 시골 땅에서 온 나를 참 여리게 봤을 것이다. 그러나 긍정적이고 적극적으로 학교생활에 임했고 그것이 미래를 개척해나가는 데 큰 힘이 됐다.

    -기자가 되겠다고 결심한 이유는
    중·고등학교 때 백일장에서 상도 타는 등 자신감을 느끼면서 글쓰기에 흥미를 가지게 되었고, 자연스럽게 기자가 되고 싶었다. 그런데 당시 독재정권시절에는 기자들이 연행되는 경우가 잦아 주위에서 반대를 했다. 그래서 맨 처음에는 현대중공업에 입사했다. 하지만 회사에서 회계 업무를 보면서 내가 하고 싶은 일이 글 쓰는 직업이라는 걸 절실히 느끼게 돼, 신문사 입사 준비를 하기로 결심했다.

    -‘한국경제’ 입사 과정이 궁금하다 
    입사 준비를 위해 편히 근무할 수 있는 직장으로 두 번 정도 옮겼다. 회사 다니면서 일 년 동안 외국어 준비도 하고 상식도 준비하며 입사를 준비했다. 이건 일화지만, 신문사에 이력서를 넣기 전, 경력란을 빈칸으로 둘 것인가 아니면 3차례의 전직 사항을 기재할 것인가 고민했다. 이력서에 빈칸으로 남겨두자니 자칫 실력 없는 사람으로 여겨질 것 같았고, 다 쓰려니 대인관계에 문제가 있는 것으로 비춰질 듯했다. 고민 끝에, 이직 내역을 다 쓰고 면접에선 나의 꿈에 대해 절실하게 이야기할 것을 다짐했다. 아니나 다를까 면접에서 얼마 다니다 옮기는 거 아니냐 식으로 질문을 해왔다. 나는 이런저런 직업을 경험한 끝에 신문사 기자라는 외길을 찾았다고 하며 한눈팔지 않고 열심히 하겠다고 답했다. 결국 79년 그 해 12월 24일, 나는 한국경제신문(이하 한경)에 입사하게 됐다.

    -특파원과 대학원도 그렇고,
    일본과 인연이 있는데

    대학 시절, 민족주의를 논의하면서 반일 감정을 많이 갖게 됐는데 훗날 기자가 되고 나서 1981년 봄에 일본으로 출장을 갔다. 그곳에서 일본의 면면을 보고 문화적 쇼크를 느꼈다. 질서와 공중도덕 면에서 한국 사회보다 더 선진적이었고 교통과 공공시설 등을 보니 일본을 배우지 않고선 우리나라가 선진국이 될 수가 없겠다고 생각했다. 그 시절엔 일본이 ‘Japan Is Number One’이라 불리며 미국을 능가한다는 목소리가 나올 정도로 대호황이었다. 하지만 영어를 잘하는 사람은 있어도 일본어를 하는 사람은 거의 없었던 때이기도 했다. 한경도 당시 미국에만 특파원이 나가있었다. 하지만 주요 언론사는 일본에 특파원을 두고 있어 한경도 곧 일본에 특파원을 파견할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기자 십년차가 될 무렵, 취재를 마친 후 하루에 3시간 정도 외대에서 일본어를 공부하는 6개월짜리 프로그램에 참여했다. 이후 언론 재단을 통해서 일본어 교육을 아침마다 꾸준히 받았고, 이런 노력들이 모여 한경의 일본 특파원을 처음으로 맡게 됐다.

    -경제 기자로 활동하면서
    잊을 수 없는 사건은

    ‘경제 기자’로서 하나의 기사가 얼마나 영향력이 크고 위험한 것인가 책임감을 느꼈던 적이 있다. 증권부 기자를 할 때 ‘영동개발진흥’이라는 회사가 부도나는 사건이 일어났다. 그런데 증권면에 영동개발진흥의 부도설과 관련하여 한 줄로 알렸더니 뜬금없이 다른 회사가 부도직전까지 몰렸다. ‘영동개발진흥’으로 풀 네임을 쓰지 않은 관계로 다른 회사인 ‘영동개발’이 부도설에 휘말리게 된 것이다. 그 사건을 계기로 언론이 무심코 쓴 한줄 보도에도 당사자에겐 생사가 갈리고 기업 입장에선 존폐가 갈릴 수 있다는 것을 알았다. 특종도 중요하지만 확인 보도를 우선시하는 건 기자가 최우선으로 갖춰야할 자질이다.

    -미디어 환경은 그간 어떤
    변화를 거쳐 왔다고 보나

    지금은 정보의 편중을 통한 언론의 권력은 많이 사라졌다. 그리고 소셜미디어의 위력은 급격히 커졌으며, 언론은 동종업계의 치열한 경쟁에서 살아남으려 노력하고 있다. 그 가운데 위기를 맞은 것은 활자 매체다. 처음엔 무가지 시장이 생기고 신문의 가판 시장이 죽으면서 스포츠지가 결정타를 맞았다. 그 다음, 모바일·온라인의 중심의 언론 시장이 형성되면서 무가지도 존망의 위기에 섰다. 예컨대, 전철에서 보면 무가지보단 거의 스마트폰으로 뉴스를 보지 않나. 또 다채널 시대 뿐 아니라 온라인 매체와 1인 매체도 생기면서 언론은 ‘난립시대’에 접어들었다. 이제 언론 산업에서는 상위 매체만이 살아남거나 특화된 전략으로 ‘Only One’을 내세우는 언론이 각광받을 것으로 본다.

    -그렇다면 언론의 과제는 뭘까
    젊은 세대들이 활자를 기피하는 현상이 심화되면서, 신문의 입장에서는 젊은 사람에게 어떻게 친화적으로 다가갈지 그 방안을 모색하는 것이 최대 과제다. 더욱이 뉴욕타임스, 워싱턴포스트 등 유력 매체들이 위기를 겪는 현상이 한창 일어나고 있기 때문에 미디어 생태계가 앞으로 어떻게 변할지 예측하기 어렵다. 따라서 미디어들은 어디에 투자를 할 것인가도 상당한 고민을 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다. 이제 언론의 생존 여부는 제대로된 진실을 일반 대중에게 어떤 방법으로 전달하는가에 달렸다. 결국 이 정책이 왜 나왔고 이로 인해 생길 영향이 어떤 것인지, 향후 전망 등 이슈를 해설·해석·분석할 줄 아는 ‘특화된’ 미디어의 등장이 필요한 것이다.

    -대학도 경제 논리로 재편되는
    추세인데 우리학교가 나아갈 방향은

    선택과 집중으로 특화 전략을 구사해야 한다고 본다. 일장일단(一長一短)이 있을 수 있지만 각 단과대학별로 독립 채산 형식으로 경쟁 체재를 갖춰 학교 내에서도 경쟁을 유발해야 한다. 새로운 재단을 맞은 중앙대가 이런 방식을 적용하고 있다. 여기에 ‘스타 교수’와 ‘스타 학생’, ‘스타 졸업생’을 배출할 수 있는 시스템이 갖춰져야 한다.
    이외에 우리 대학이 생각보다 덜 알려져서 손해 보는 게 많은데, 극복 방안으로 여러 대학에서 실시 중인 ‘대외부총장 제도’를 도입해 외부에서 다양한 경력을 가진 사람을 대외부총장으로 영입해야 한다. 이를 통해 외부 인사의 조력과 학내의 노력이 합쳐져 높은 홍보 효과를 낼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재무부총장 자리도 신설해 외부에서 자금을 끌어올 수 있는, 특화되고 유능한 개방형 인재가 그 자리에 임명됐으면 한다. 또 특정 학교에 편중돼온 교수 채용 시스템을 개방적으로 개편해야 할 필요가 있다. 도제관계식의 닫힌 임용 대신, 총장 주재하에 동문회와 개방이사까지 포함한 교수 채용 위원회를 구성해서 보다 열린 채용과정을 거쳤으면 한다.

    -애교심이 부족한 원인으로 동문과
    학교 간의 약한 유대관계를 꼽고 있는데

    동문회에서 오랫동안 요구해온 개방이사 제도가 최근에서야 수용됐다. 동문교수, 교직원을 채용하는 데 있어서 동문 비율이 굉장히 적다고 하는 불만들도 있어왔다. 학교와의 유대관계를 보면 미진한 부분이 있었던 게 사실이다. 학교가 발전하려면 재단과 학교 그리고 동문회가 삼위일체로서 연결고리를 강화해야한다고 본다.

    -우리학교 학생에게
    당부하고 싶은 말은

    우선 자기 자신이 어느 위치에 있는지부터 알아야 한다. 설령 좌절을 맛봤더라도 현실을 인정하고 노력을 해야 한다. 세상에는 천하를 호령하는 고수가 많은 만큼, 세상에 나오기 전인 학창시절에는 고수가 되기 위한 기본을 닦아야 한다. 인생의 목표를 정해서 대학 시절 진정으로 노력하면 그로 향하는 길이 분명 제시될 것이다. 또한 요즘 ‘힐링 서적’들이 많은데 그런 서적이 마음의 위안은 될지 몰라도 자기 인생의 방향은 제시해주지 않는다. 마지막에 구슬을 꿰어야하는 건 본인이다. 마지막으로, 자기 자신을 사랑하라는 말도 당부하고 싶다. 내 실력을 못 믿고, 내 삶의 만족을 못 느끼면서 어떻게 다른 사람을 만족시키며 이 세상을 살아나갈 수 있겠는가.


    글/ 고동완 기자
    kodongwan@kookmin.ac.kr
    사진/ 김지원 기자
    haje201@kookmin.a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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