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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광수 감독 연구(4) '그들도 우리처럼'
    생각/영화 2020. 4. 30. 22:18

    “탄광촌에 한국 사회를 축약시켜 보겠다”

      박광수는 시선을 도시의 빈민 노동자에서 탄광으로 옮긴다. 박광수의 차기작은 1990년 <그들도 우리처럼>이었다. 영화의 연출과 각본을 맡은 박광수는 제작 의도에서 “이 영화는 단지 탄광촌이란 무대를 빌렸으나 한국 사회의 모습을 축약시켜 보고자 했다”고 밝힌 바 있다. 김시무(2010), 「박광수 감독의 영화세계 - 분단시대의 작가정신 혹은 역사의식」, 공연과 리뷰, pp.31~43


     그의 의지는 허상이 아니었다. <그들도 우리처럼>의 얼개는 이렇다. 80년대 후반 한태훈(문성근 역)은 운동권에 몸담다 수배자 신세가 된 나머지, 김기영이란 가명으로 강원 탄광촌으로 몸을 피신한다. 탄광촌엔 연탄공장 사장의 아들 이성철(박중훈 역)과 이성철의 폭압 아래 몸을 팔아 사는 다방 레지 송영숙(심혜진 역)이 있다. 한태훈은 이성철의 연탄공장 잡부로 들어가게 되고, 송영숙을 만나 인간으로서 서로 정을 느낀다. 

     


      이러한 인물들의 면모는 영화의 주제 의식을 부각시키는데, 노동운동에 투신했던 한태훈은 시대적 현실에 결국 도피를 택했으나 당시 탄광촌 광산들이 폐업을 하면서 노동자의 반발이 잇따르던 시기에 침묵을 택하는 건 한태훈의 자아를 억누르는 것이었다. 그러나 지명 수배를 받고 있던 한태훈으로선 당장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소극적 저항 아니면 상황의 회피뿐이었다. 여기에 노동자들의 노동에 의탁하여 호의호식하던 이성철의 등장과 그의 송영숙을 향한 폭압은 한태훈의 자아를 다시금 꿈틀거리게 하는 계기가 된다. 소시민적 삶을 살다 부정의를 보면 다시금 정의를 생각하는 다수의 이를 한태훈의 그러한 모습에서 발견할 수 있는 것이다. 

     

      또 어머니를 버린 아버지 슬하에서 자라난 이성철의 폭압은 슬픈 사연 가운데 반복되어지는 인물의 악한 운명을 그려낸 것이기도 하다. 아이러니하게도, 어머니가 버려짐으로써 싹튼 비극이 다시 여성(송영숙)에 대한 폭력으로 귀결되고 있다는 점이다. 이러한 모순점들은 당시 한국 사회가 안고 있는 부조리이자 동시대의 한국 사회가 해결해야 할 난제 중 하나다. 결국 <그들도 우리처럼>의 탄광촌은 박광수가 밝힌 것처럼 한국 사회의 축약판이라 할 수 있는 것이다


      영화는 전작에서처럼 탄광촌의 공간성을 적극 활용한다. 총천연색 빛깔을 장면에 투영하기보단 음침함이 묻어나오는 탄광촌을 비춘다. 그런 가운데 한태훈과 송영숙의 사랑을 어두침침한 공간성과 대비하는 연출을 선보인다. 마치 흑빛이 가득한 세상 속에서도 인간의 정을 통한 희망은 가능하다는 인상을 남긴다. 이것이 감독이 보여주고자 했던 궁극적 메시지였는지도 모른다. 사랑은 끝내 이성철의 꼬드김으로 이뤄지지 못하나, 한태훈이 탄광촌에서 빠져 나오면서 기차 안에서 “우리들이 오늘을 뭐라 부르든 간에 이미 변화는 시작되었다. 사라져야 할 것들은 오늘의 어둠에 절망하지만 보다 찬란한 내일을 사는 사람들은 오늘의 어둠을 희망이라 부른다”라고 읊는 독백은 궁극적 메시지를 뒷받침하는 구실을 한다. 

     

      <칠수와 만수>가 만수의 투신과 칠수의 체포로 다소 비극적으로 마무리가 됐다면, <그들도 우리처럼>은 이성철이 희생되고 송영선이 경찰에 잡히기는 하지만 한태훈을 통해 희망을 읊고 있다는 점에서 일말의 긍정성을 세상에 투영한 것이라 할 수 있다. 달리 말하면 모순이 가득한 이 사회에서 그럼에도 희망의 여지가 있다는 것이며, 박광수가 말한 ‘축약’은 그렇기 때문에 더욱 값지게 되는 것이다. 

     

      박광수는 <칠수와 만수>에 이어 이 영화로 사회 문제를 다루면서 리얼리즘을 추구하는 감독의 명성을 굳힌다. 탄광촌의 인물들을 세세히 묘사하지 못했다는 일각의 비판도 있었지만, 작품성을 인정받은 <그들도 우리처럼>은 낭트영화제에서 심사위원특별상을 받는 쾌거를 올린다. 「박광수 감독, 낭트영화제서 심사위원특별상」, 한겨레, 1990.11.29.

      <그들도 우리처럼> 개봉 이후, 박광수의 자의식을 엿볼 수 있는 일화가 있다. <그들도 우리처럼>에서 처음으로 악역으로 변신한 박중훈은 라디오 스케줄에다 영화 촬영이 겹쳐 서울과 강원을 오가며 나름의 ‘연기 투혼’을 선보였으나 박광수가 보기엔 연기가 영 신통치 않았던 모양이다. 박중훈은 퇴계로 근처의 선술집에서 술을 마시던 중 벌어진 일을 회상했다. 박중훈, 「감독님, 그건 좀 심했답니다」, 씨네21, 2009.04.03.

     

      술이 취한 박광수가 박중훈에게  “넌 서울까지 왔다갔다하느라고 연기를 열심히 하지 않았다”고 말했고, 박중훈이 “미안하다”고 답하자 “미안함을 보여주려면 가위로 발가락을 자르라”고 박광수가 답했다는 것이다. 박중훈은 예술가로서 워낙 작품에 대한 생각과 자의식이 강한 형이라 술김에 그런 얘기를 한 것 같은데 그 때 받은 충격이 컸다고 술회했다. 비록 취기가 무르익은 상황에서 벌어진 일이지만, 어쩌면 박광수의 본심을 드러낸 일이기에, 박광수가 배우의 연기 하나하나를 마음에 두면서 영화의 완성도를 얼마나 끔찍이 생각했는가를 살펴볼 수 있는 대목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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