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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광수 감독 연구(6) 피해자의 서사를 어떻게 다룰 것인가, <그 섬에 가고 싶다>
    생각/영화 2020. 5. 3. 23:28

      박광수도 이를 고민했는지 다시 국내에 집중한다. 박광수는 다시 한 번 ‘공간’에 집중하는데, 이번엔 섬이었다. 1993년 영화 <그 섬에 가고 싶다>다.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임철우의 소설 원작을 각색한 것으로, 박광수는 임철우와 시나리오 작업에 참여하여 섬이란 장소를 통해 분단 의식의 장르를 잇는다. 영화는 첨예한 갈등에서 시작한다. 아버지 문덕배(문성근 역)의 아들, 문덕구(문덕배 역과 동일)는 유언에 따라 죽은 문덕배를 배에 싣고 고향이었던 섬으로 오려 한다. 그러나 무슨 영문에선지 섬사람들은 문덕배를 받아들이는 데 극렬히 반대하고, 그나마 섬에 당도한 김철(안싱기 역)에 의해 회상이 펼쳐지면서 관객은 그 이유를 알게 된다. 

     

      문덕배는 자신의 부인과 자녀를 돌보지 않다가 외도를 하여 정을 통한 여성을 임신하게 하고, 부인이 죽자 그 여성과 결혼할 것을 마을 사람들에게 이해를 구한다. 이를 용납 못한 마을 사람들은 문덕배를 가혹하게 다루고, 이에 앙심을 품은 문덕배는 한국전쟁이 벌어지던 시점에 피해 사실을 한국군에 알려 사상검증을 위한 밑거름 역할을 한다. 그 검증이란 것은 한국군이 인민군으로 위장하여 잠시 인민군 행세를 한 뒤, 마을 주민들을 걸러내는 것이었다.

     

      순진무구한 마을 사람들은 이데올로기 앞에 당장의 먹고 살 걱정과 혹은 그간의 핍박을 생각하여 인민군에 찬동하는 자세를 보였고, 이 마을 사람들은 결국 사상검증에서 좌익으로 몰리는 신세가 된다. 그 후손은 이런 과거를 생각하면 그 때의 기억이 잊히질 않아 문덕배를 섬에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섬에서의, 자못 단절된 공간 안에서의 주먹구구식 사상검증으로 인한 피해는 마을 주민들에게 고스란히 돌아갔고, 이는 한이 되어 외부인이 되어버린 문덕배의 혼을 섬에 들이는 걸 원치 않았던 것이다.

     


      박광수는 그러한 풀리지 않는 한을 섬과 바다로 나눠버린 대치의 간극을 통해 묘사해냈다. 촬영된 섬은 전남 보길도다. 김용신, 「영화 속 전쟁과 평화: <그 섬에 가고 싶다>」, 통일한국, 1997, pp52~53. 전쟁의 풍파 가운데서도 이데올로기에 잠식되지 않았던 해남의 마을이 분단과 강고한 체계 앞에 풍비박산 나는 대목은 지금도 유효한 장면일 터다. 특히 사상검증이 한창 이뤄지던 시점에 멋모르고 뛰어 놀다 총탄에 목숨을 잃는 바보 옥님(심혜진 역)은 인간 본연의 순진함이 사상 안에 파괴되어버리는 비극을 보여주는 것이다.

     

      박광수는 바보 옥님의 스러짐을 슬로우로 처리함으로써 인간성의 파괴를 슬픔에 엮어내는 듯한 연출을 선보인다. 그리하여 인간보다 우위에 있는 사상은 곧 허구라는 것을 드러내는 것만 같다. <그 섬에 가고 싶다>를 통해 박광수는 고집처럼 밀고 왔던 분단 의식에다 휴머니즘을 분명히 담아냄으로써 전작의 주제를 끌고 오면서도 또 한 번 변주를 단행한다. 또 박광수는 문덕배에 의해 고난을 받는 부인에 대한 조망을 통해 뿌리 깊게 이어져오던 여성에 대한 억압과 그로 인한 피해를 그려냈다는 점에서 인간에 대한 억압은 남녀 불문 이뤄져선 안 된다는 것을 재차 강조하는 것만 같다.

     

      이는 <그들도 우리처럼>이 그린 송영숙과 궤를 같이 하는 것으로, 박광수가 억압을 받던 여성에 대한 문제의식이 일찍부터 있었음을 시사한 것이다. 이를 뒷받침 하듯, 박광수가 실험적으로 연출한 2000년 <빤스 벗고 덤벼라>, 2003년 <여섯개의 시선>에 출품한 <얼굴값>에서도 여성 문제를 고찰하려 한다. 또 다른 특징은 <그 섬에 가고 싶다>가 <베를린리포트>에 이어 윤리적 미학을 이어가고 있다는 점인데, 그 중 학살 장면을 묘사조차 하지 않은 점이 그렇다. 문덕배의 아들, 문덕구와 김철의 시선을 통해 학살로 생겨난 무덤을 비출 뿐이다. 사물을 간접적으로 드러내면서도 이야기의 맥락을 잇는 이러한 박광수의 연출은 선정성에 집착하기보단 피해자의 서사를 윤리적으로 어떻게 다룰 것인지 고민에서 나온 산물인 것 같다.


      문성근은 <그 섬에 가고 싶다>가 나온 지 10여년이 흘러 촬영 당시를 생각하며, “유영길 촬영감독이 그림이 안 나온다며 바다 한가운데로 나가야겠다고 선주에게 요구했다. 배가 부두로부터 멀어지는 동안 파도는 거세졌고 선주 얼굴은 사색이 되어갔지만 유 감독은 뱃머리 돌리자는 말을 꺼내지 않았다. 카메라 잡는 데만 온 신경을 쏟고 있었다. 박광수 감독과 다른 스탭들 모두 앵글에 걸리지 않고자 갑판에 누워 성난 물 세례를 맞으면서도 불평 하나 없었다. 배멀미하는 사람도 없어, 다들 영화에 미쳤구나라고 생각했다”며 박광수를 비롯한 제작자들의 영화에 대한 뜨거운 열정을 회상한다. 문성근, 「내 영화인생 최고의 순간들」, 씨네21, 2003.07.10.


     <그 섬에 가고 싶다>는 영화 <오아시스>와 <박하사탕> 등을 연출한 이창동 감독이 처음으로 영화에 뛰어든 작품이기도 했다. <그 섬에 가고 싶다>의 시나리오 작업을 박광수, 임철우와 함께 맡았던 이창동은 “박광수 감독이 전화해서 임철우 소설 <그 섬에 가고 싶다>를 영화화하고 싶은데 원작자를 만나게 해달라기에 만나게 하고 이런저런 얘기하다가 시나리오를 써보라는 제의가 들어와, 그래서 그러면 나를 조감독으로 받아줄래? 거래가 이뤄졌다”고 술회했다. 오계옥, 「이창동 감독을 작가로 만든 힘」, 씨네21, 2004.12.14. 이창동은 <그 섬에 가고 싶다> 조연출을 맡아 박광수의 연출부에 소속돼 영화 제작에 동참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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