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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아티스트>, 영화의 미덕, 본질
    생각/영화 2020. 5. 4. 22:58

      시대가 변해도 사라지지 않는 것이 있다. 본질이 그것이다. 외형적 성장을 추구하면서도, 본질을 잊지 않아야 한다고들 한다. 미디어, 특히 저널리즘이 그렇다. 저널리즘에 대한 신뢰는 어떤 기교에서 비롯되지 않는다. 콘텐츠의 충실성과 취재의 진실성에서 비롯된다. 본질을 두고 해석이 천차만별이었다면 저널리즘의 신뢰를 높일 방안의 경우의 수는 헤아리기 어려웠을 것이다. 


      그러나 본질은 비교적 명확하다. 본질의 영역은 제한적이지 않지만, 보편적으로 받아들이는 영역이 분명 있다. 비단 저널리즘뿐 아니라 사람의 인심을 얻는 행위와 관련된 산업에는 본질이 존재한다. 백종원이 음식점을 탐방하며 지적하는 내용은 대개 본질과 관련한 것이다. 맛과 서비스의 질이 낮으면 본질과도 거리가 멀어진다. 다만 본질이 무엇인지 우리는 암묵적으로 합의하고, 이해하면서도 이를 현실화하기는 어렵게 느껴진다. 콘텐츠의 충실성이 중요하다고 하지만, 치열한 경쟁에서 수용자의 이목을 어떻게 끌 것인지는 난제에 가깝기 때문이다. 여기서 본질에 대한 고민이 시작된다. 본질은 아는데, 어떻게 본질을 지켜나갈 것인가.

     


      영화 <아티스트>는 1920년대 후반, 무성영화에서 유성영화로 변모하는 궤적을 그려냈다. 형식에서의 탈바꿈은 기화와 좌절을 동시에 제공한다. 변화의 흐름에 승기를 잡으면 기회를 얻는 것이고, 도태되면 좌절을 겪는 것이다. 무성영화의 최고봉 스타였던 조지 발렌타인은 변화를 읽지 않는다. 인기의 무게추가 유성영화로 급격히 쏠렸음에도 불구하고, 조지는 무성영화를 고집하려 한다. 결과는 쪽박일 수밖에 없었다. 


      조지의 이런 고집은 우스꽝스럽거나 단순 아집으로 치부할 것은 못 된다. 형식의 변화는 상실의 의미를 동반한다. 가령, 컴퓨터그래픽(CG) 기술의 발달은 영화에 영상미를 더해줬지만 사실감은 떨어뜨리고 말았다. 과거 전투 장면을 찍으려면 엑스트라를 대거 동원했지만 기술의 발전과 효율성의 논리가 맞물리면서 CG가 장면을 보완하는 방식이 자리를 잡았다. 우리는 이제 대규모 군중 장면이 나오면 감탄을 하거나 실재감을 느끼기 보다는 CG로 으레 인식하고, 감흥을 물리는 경향이 있다.


      무성에서 유성으로의 변화도 CG의 사례와 일맥상통하는 부분이 있다. 유희의 정도가 다소 줄어들었고, 배우의 보폭도 일부 축소됐다. 물론 이후에 마이크 기술이 발달하면서 보폭은 넓어졌다. 그러나 형식의 변화에 열광하는 사이, 놓치고 만 것은 없는지 검토할 필요는 있다. 특히 전대의 기술이 누적되며 후대에 전승되는 영화라면 과거의 형식에도 눈을 돌려야 한다. 영화는 과거와 떼려야 뗄 수 없는 축적의 집합체이기 때문이다. 관람객 입장에선 무성영화는 고리타분한 형식에 지나지 않을지도 모른다. 인물의 목소리에 그저 기울이고 싶어도 자막 몇 마디로 상황을 짐작하고, 감지해야 하는 피곤함이 있다. 또 들리는 소리라곤 의도적으로 넣은 배경 음악 정도임을 알 때, 현실성과의 괴리는 영화에 대한 흥미를 잃게 하기 쉽다. 자본의 투입과 수요의 반응으로 영화가 제작되는 점을 상기하면 유성으로 형식이 변화하는 것은 필연이었을 것이다. 


      다만 본질을 엿보려면 형식의 변화로 대중의 수요에 부응한 영화들만 탐색할 순 없다. 좀 더 거시적으로 바라볼 수밖에 없다. 본질을 거론하려는 근저에는 사실 실패의 교훈도 뒤따르는 법이다. 무성영화 자체가 실패라고 단정 지을 수도 없으며, 인기에서 멀어졌다고 본질을 찾을 수 없다는 것은 아니다. 조지가 무성의 형식을 고집하려 했던 것은 그저 아집에 의했다기보다 영화에 대한 애정이 곁들은 결과인지도 모른다. 누군가는 무성영화를 만들어야 하지 않겠냐면서 말이다. 

     


      영화사에서 고전으로 내려오는 영화 가운데엔 무성영화도 있다. 그중 찰리 채플린이 만든 영화를 빼놓을 수 없다. <모던 타임즈>는 노동과 삶의 괴리를 주목한 불후의 수작이다. 2019년에도 <모던 타임즈>가 회자되는 것은 다른 작품에선 흉내 내기 어려운 나름의 철학과 유희가 담겨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무성이냐, 유성이냐는 부차적 문제일 것이다. <모던 타임즈>는 유성영화를 통한 리얼리즘보다 더 실재적 내용이 담긴 영화로 여겨진다.


      물론 21세기, 무성영화의 제작은 이례적으로 받아들여질 것이다. 그만큼 대중의 문법이 유성영화로 통용되기 때문일 것이다. 무성영화는 익숙함보다는 낯선 것이 되어버렸다. 고전적인 흑백 장면을 동반하는 무성영화는 참신함보다는 낡은 것으로 인식되기 일쑤다. 상업적 성공을 거두어야 하는 투자자 입장으로선 무성영화는 피해야 할 형식이다. 다만 유성영화가 흥행의 성공률을 높일 순 있더라도 수작의 대열에 합류하거나, 성공으로 귀결되지는 않는다는 점이 간과되고 있는 것은 아닌지는 돌아볼 대목이 있다. 맛을 내려 MSG를 과도하게 넣었다가 본연의 맛은 이도저도 아닌 음식은 형식에 주안을 두다 입방아에 오르는 영화와 닮은 구석이 있다. 대중적 수요에 반응한 것 마냥 형식에 치중하다 뒤안길로 사라진 영화가 한둘이 아니다. 


      안타깝게도, 그런 영화들이 스크린 시장의 상당 부분을 차지하고 있다는 현실을 무시하기 어렵다는 점이다. 관객의 선택권은 협소하기 이를 데 없고, 대중의 수요라는 것이 제작사와 배급사의 편의로 이뤄진 산물이 아닐까 착각이 들곤 한다. 이것은 본질의 딜레마다. 영화의 본질도 저널리즘처럼 비교적 명확하다. 내용의 충실성이 그것이다. 경우에 따라선 서스펜스의 요소, 연출 기법 등이 가미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스토리 라인이 탄탄하지 않다면 도입된 기법이란 것도 기교에 지나지 않게 된다. 


      다만 충실성의 흐름을 따라가더라도, 본질을 추구하더라도 시장의 호응을 받을 것인가는 다른 문제다. 이미 관객의 선택권은 제한되어 있다. 짜준 시간표대로 영화를 봐야 한다. 형식 논리에 치중한 영화가 범람한다. 형식 논리를 배제할 순 없지만, 본질과는 비껴서면서 기교를 앞세우려는 영화가 시장에서 우위를 점한다는 것은 분명 문제가 있다. 조지가 타협하지 않으려 했던 것도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한다. 무성에서 유성으로, 배우의 목소리로 관객의 흥미를 돋우는데 성공했지만 무성의 흔적들을 잠식할 순 없는 것이다. 성공을 거둔 페피가 무성영화 배우들을 두고 퇴물이라고 했지만, 퇴물로 범주화됐던 조지에 의해 성공의 발판을 마련할 수 있었던 것은 역설적이다. 축적과 협력, 개선을 영화의 본질, 나아가 사회의 본질로 바라보기 위한 감독의 의도인지 모른다.


      본질을 추구하기에는 녹록치 않은 환경이다. 스크린은 편의를 동반한 형식 논리를 관객에게 주입하는 경향이 있고, 관객은 그러한 관습에서 떨쳐내기 어려운 환경에 있다. 그럼에도 본질을 도외시하고, MSG에 치중한 영화가 평단의 호평을 받기는 어려운 일이다. 영화의 발전이라는 것은 결국 본질을 추구하려는 행위에서 비롯될 것이다. 특히 영화는 단절과 폐쇄가 아닌 공유의 개념이다. 제작하고 썩히는 것이 아니다. 대중뿐 아니라 경쟁하는 작가와 감독에게도 문호를 개방한다. 공개에 있어선 적대적 개념이 자리하지 않는다. 그래서 어떻게 축적을 하느냐가 중요하고, 본질을 추구하려는 행위가 더 본질적으로 다가오게 되는 이유일 것이다. 그런 점에서 조지가 고집에서 벗어나 페피와 연합을 하기로 한 것은 상징적이다. 무성이냐, 유성이냐의 형식 논리에 빠지지 않고, 각자의 역량을 보존하면서 축적의 길로 나아가는 행위이기 때문이다. 


      그 연합의 과정이 단시일에 이뤄지지 않았다는 점이 흥미롭다. 연합은 대미를 장식하는 말미에 짧게 이뤄질 뿐, <아티스트>가 상당 시간을 할애했던 이야기는 조지의 철학이었다. 누군가는 아집으로 치부하겠지만 조지가 시류에 뜻을 바로 굽혔다면 조지만의 자율적인 영역, 이를테면 연기의 분야나 연출의 방식도 축소됐을지 모른다. 영화는 자본으로 만들어지고, 대중의 수요에 민감한 예술이지만 개별적인 단편으로 마무리되는 성격이 아님을 <아티스트>는 보여주고 있다. 간과하지 않고, 계승하고 축적하는 것, 영화의 미덕, 본질의 일부분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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