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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광수 감독 연구(7) 역사적 인물에 조명을 하기 시작한 박광수
    생각/영화 2020. 5. 4. 22:49

      박광수는 현대사에서 다뤄볼 법한, 그러나 아직 다루지 못한 인물에 대한 조망으로 다음 영화를 골랐다. 그 시작은 1995년 영화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었다. 전태일이란 인물은 박광수가 추구하려 했던 약자에 대한 시선, 인간 그 자체보다 분단 이데올로기에 우위를 두면서 생겨나는 부조리, 그리고 사회 의식적인 부분과 맞아 떨어지는 지점이 있었다. 영화가 다루고자 하는 전태일의 분신은 앞으로도 끊임없이 반복될 물음을 낳은 것이었다. 분신은 노동 실태를 전면에 알리고, 노동운동의 불쏘시개가 됐지만 과중한 노동 시간과 메탄올 실명과 같은 노동자의 재해가 반복되는 작금의 현실에서 노동에 대한 고민을 지속적으로 안겨주는 매개가 되어주고 있었던 것이다.

     

      그러한 점에서 박광수가 영화의 소재로 전태일을 고른 건 박광수 본연의 색채와 의식이 반영된 작업이자 어쩌면 당연한 귀결점이라 할 수 있겠다. 사실, 전태일을 영화로 만들려는 작업은 1995년 훨씬 이전부터 진행되어오던 작업이었다. 개봉일은 1995년 11월 18일이었지만 제작 기간은 1년 반이었고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동아일보, 1995.11.16., 제작비도 사상 초유로 국민 모금으로 마련할 수 있었다. 국민 모금은 최저 2만원을 두고 영화 종영 후 흥행률에 따라 후원금 상환의 조건을 달고 진행됐다. 지금으로 치자면 일종의 펀드로 자금을 모았던 셈이다. 후원은 한겨레신문사, 전국노동조합대표자회의, 사단법인 한국민족예술인총연합이 도왔다. 「전태일 영화」, 한겨레, 1994.11.23.

      제작비 조달에 있어서 국민 모금을 택한 건 불가피한 현실 탓이다. 영화 기획자 유인택은 “영화 하면 기본이 8억이 들지요. 보통 비디오 판권 3억, 지방 장사로 5억을 벌어야 하는데 업자들 입장에서 문화사업을 하는 사람들도 아니고 돈냄새가 나는 영화여야 사거든요. 그렇다고 기획시대(영화 기획사)와 박 감독이 흥행에 성공한 것도 아니고... 새로운 자금조달 방식을 만들어야겠다고 생각했습니다”라고 밝혔다. 신진화(1994), 「영화 <전태일>을 만들겠다는 무모한 두 남자」, 월간 사회평론 길

     

     

      결국 7천여 명에 달하는 후원 동참과 뒤늦게 제작에 동참한 대기업의 자금 투자로 영화 제작은 마무리될 수 있었다. 자금 조달만큼이나 난관은 시나리오 작업이었다. 전태일은 고 조영래 변호사가 집필한 책 <전태일 평전>을 통해 전태일의 일대기를 아는 사람이면 익히 알던 터였다. 이를 영화화하는 건 평전과는 다른 것이어야 했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 시나리오 초고에 참여했던 이효인 영화평론가는 “기념사업회와 유족들은 지나치게 과격하거나 또는 엉뚱한 영화가 나오지 않을까 걱정을 하고 있던 참이었다. 유족들과 관계자들은 전태일의 삶을 극화하는 데 치중한 나머지 사실이 아니거나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의심스러운 주변인들의 의견이나 기억을 영화 속에 드러내는데 결코 찬성하지 않았다.

     

      무엇보다 전태일 정신을 상기한다면 그러한 극화는 그 정신에 어긋나는 일이라는 것이 제작진들 공통된 견해였다. 문제는 사실로 받아들이기에 충분한 사실이란 것들이, 분신 순간을 제외한다면 그다지 극적인 요소를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점이었다 이효인, 「역사 복구와 영화적 복원의 문제」, 오늘의 문예비평, 1996, p.158. ”라고 당시 상황을 회상했다. 시나리오 작업에는 이창동, 김정환, 이효인, 허진호, 박광수 등이 참여했는데, 영화가 제작되기로 한 이상, 전태일이 주축이 된 영화의 서사를 어떻게 대중들과 호흡하며 이목을 끌 수 있을 것인지 시나리오 작성자 입장에선 피할 수 없는 과제였다. 그렇게 택한 것이 전태일이 활동하던 1970년 과거와 그로부터 시간이 지난 1975년 시점의 교차였다.


      1975년 법대생 김영수(문성근 역)은 경찰의 수배에 몸을 숨기고 있다. 그런 와중에 그가 하는 일은 전태일의 경로를 따라가 보는 것. 그리고 전태일의 전기를 쓰는 것이다. 전태일의 죽음은 노동계뿐만 아니라 지식인계에도 큰 충격을 안겼다. 이를 모티브로 한 영화는 김영수의 시선과 전태일의 시선이 칼라와 흑백으로 교차하며 병렬을 이룬다. 김영수가 전태일이 일했던 곳 주위를 바라볼 때면, 과거로 회귀해 흑백의 장면을 통해 전태일의 생전 모습이 나오고 김영수의 고뇌와 전태일의 결기가 맞물리면서 영화의 상승 작용을 일으킨다. 영화는 분명 고 조영래 변호사가 썼던 <전태일 평전>이 근간을 이루고 있지만, <전태일 평전>에서 가장 시사점을 던져줄 만한 내용을 압축적으로 전달하면서 그 이후의 시대적 고민을 함께 담아내는 방법을 취한다. 

     

      영화는 김영수와 전태일의 시선뿐 아니라 서두에 진행되는 1990년대 노동계의 시위 현장을 집어넣음으로써 전태일이 몸소 보여온 실천의 자세와 고민의 흔적이 과거에 국한된 것이 아님을 증명하는 것만 같다. 물론 이러한 회상의 구조에서 군더더기가 보임에 따라 영화의 서사가 일부 겉돌았다는 비판이 없었던 건 아니다. 이효인 평론가는 “(회상씬 일부가) 전태일의 삶을 이야기하는 참고 정보라기보다는 영수의 삶에 대한 참고 정보이다. 이러한 참고 정보가 영수에 대한 묘사에서 필요했다고 하더라도 그것이 태일에 대한 묘사를 아우르는 논리적, 정서적 역할을 이루지 못할 때는 군더더기가 되고 만다 이효인, 「역사 복구와 영화적 복원의 문제」, 오늘의 문예비평, 1996, p.161. ”라고 지적했다. 

     

      그럼에도 영화는 전태일의 역사적 맥락을 복원해내는 데 성공했으며, 대중의 호평도 이끌었다는 평단의 지지를 받았다. 특히 전국 관객 50만 명을 불러 모아 흥행에 성공했으며, <씨네21> 독자는 연말 최고의 영화, 감독 투표에서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 61.8%, 박광수 감독에 64%라는 지지로 찬사를 보냈다. 김혜리, 「한국영화 10년, <씨네21> 10년 [2]」, 씨네21, 2005.03.04. 특히 국민 참여로 이뤄진 영화가 성공함에 따라 대기업 위주로 자금을 조달했던 제작 패러다임을 작게나마 균열을 냈다는 점에서도 의의가 있을 것이다.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은 박광수가 그간 채록해왔던 것들을 집결해서 탄생한 것이라 해도 과언이 아니다. 법대생 김영수가 수배 신세로 내몰린 점은 <그들도 우리처럼>의 한태훈을 떠올리게 하고, 영화가 담아낸 여공들의 비참한 삶은 사회 밑바닥을 그려내면서 기층민과 사회가 분절된 현실을 조망한 <칠수와 만수>의 연장선이라 불릴 만하다. 박광수는 또 사실감의 극대화를 위해 실험을 마다하지 않았는데, 전태일이 분신하는 장면에서 한국영화 사상 처음으로 워터젤을 이용한 촬영을 시도한 것이다. 워터젤은 불의 열을 식히고 화상을 방지할 수 있는 물질로 이 물질을 적신 속옷을 입고 피부에 바르면 화염을 견딜 수 있어, 사실감 높은 화면을 만들어낼 수 있다고 한다. 정민수, 「영화 창작방식 변화에 따른 문제점 해결 방안 연구」, 영산대 영화영상학과, p.9.


      박광수는 주제 의식의 효과적 전달을 위해 <베를린 리포트>에선 스테디캠을 사용하고, <그 섬에 가고 싶다>에선 마지막에 문덕배를 실은 상여가 불타오르고 섬으로 당도하는 씬을 컴퓨터그래픽을 통해서 전달했으며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에선 뷰파인더의 권위를 무너뜨리고 모니터를 사용했다. 허문영, 「디지털, 디지털, 레볼루션 [1]」, 씨네21, 2000.03.21. 이러한 노력들이 차곡차곡 모여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대중성과 작품성을 함께 인정받은 작품이 된 것이다. 그러한 결과는 약자를 외면하지 못했던 전태일의 노력과 투혼이 1990년대에 다시 한 번 복귀하는 공신이 됐다. 전태일 영화 제작을 통해 ‘전태일 정신’을 계승하고 이어나가려는 유족과 박광수 감독의 소기의 뜻을 이룰 수 있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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