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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박광수 감독 연구(8) 첫 조선시대 ‘사극’과 ‘실패’(이재수의 난)
    생각/영화 2020. 5. 6. 03:18

      그로부터 3여년이 지나 박광수가 택한 건 이재수란 인물이었다. 1999년 개봉한 <이재수의 난>은 현기영의 소설 <변방에 우짖는 새>를 원작으로 한 영화로, 당시 35억 원이란 ‘블록버스터’급 규모로 만들어졌던 영화다. 이때부터가 박광수 필모그래피의 전환점이라 할 수 있으며, 종전의 호평들이 사그라지는 계기가 됐다. <이재수의 난>은 흥행에서 참패를 했는데, 그 참패의 성격이 <칠수와 만수>와 동격으로 논할 것이 아니었다. 영화의 배경은 1901년이다. 군수 채구석(명계남 역)의 심부름꾼 이재수(이정재 역)은 마을에 닥쳐온 격랑에 휩싸인다. 그 격량은 제주민 사이의 종교를 둘러싼 대립이었다. 천주교인들은 양반, 계급 사회 혁파를 내걸고 제주민들로 하여금 행패를 부리고, 이에 천주교인에 앙심을 품은 제주민들은 반격에 나선다. 

     

      채군수의 심부름꾼이었던 이재수는 이 대립의 상황에서 천주교인이 아닌 제주민들 편에 서서, 천주교 박해에 나선다. 박광수가 주로 다뤄왔던 70년대 이후의 배경과는 이 영화에서 종교를 기저로 한 갈등과 엇나가는 부분이 있으나, 박광수는 사상이 인간보다 우위에 있으면 안 된다는 뉘앙스를 그간의 영화로 보였듯이, <이재수의 난>에서도 인간을 사랑하라던 종교의 당초 취지와는 퇴색된 종교인의 행동에 대해 비판적 시선을 견지하려는 것처럼 보인다. 다만 그 비판적 시선이라는 게 카메라의 움직임 같은 것으로 직접적으로 전달하기보다, 인물의 대사와 행동을 통해 간접적으로 드러낸다는 점에서 종전의 작품의 결을 이은다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다만 <이재수의 난>은 종전 작품들과 달리 인물의 묘사에 있어서 일부 맹점이 드러난다. 민간과 종교의 대립, 민간과 국가의 대립 등 다양한 층위가 얽힌 영화의 서사 속에 간접의 전략을 고집한 나머지, 인물에 대한 설명이 약화되고 말았다는 점이다. 예컨대, 제주를 떠나 한양으로 상경하길 원하는 이재수는 자신의 배포를 말하면서도, 무슨 영문에서 천주교도를 몰아내고 처형하는데 서슴없이 선봉에 나서게 된 것인지에 대한 내용은 인물의 대사에서도, 행동에서도 그 설명이 결여된 측면이 없잖아 있다. 이는 리얼리즘의 측면에서 간접의 접근을 구사해오던 박광수의 인물에 대한 묘사가 어느 영역에선 불충분하다는 인상을 주기에 충분한 것이었다. 

     

      당연히 독자들은 인물에 대한 공감도가 떨어지게 되고, 장황한 내용이 정리되지 않은 시점에서 내면이 그려지지 않은 인물의 대사를 통해서만 사안을 인지해야 하는 상황이 빚어지는 것이다. 또 이재수가 연모했던 숙화(심은하 역) 또한 이재수가 가담한 민·관·종교 대립의 서사에 끼어들지 못하고 겉돈다는 인상만 주면서, 불필요한 멜로의 서사가 들어갔다는 비판도 얹히게 됐다. 박광수가 제작해왔던 전작의 <칠수와 만수>, <그들도 우리처럼>, <베를린 리포트> 등은 한국 사회가 안았던 문제의식을 조망한다는 측면에서 관객에게 인물의 의식을 설명하는 데 별다른 어려움이 없었으나 <이재수의 난>은 그러기엔 간단한 게 아니었던 것이다.


      이런 맥락에서 주진오 상명대 교수는 “이재수는 그 자신이 관노로 지배층의 하수인이었으며, 그가 문명개화로 간주되었던 천주교와 극단적으로 대립했던 이유가 설명되지 못하고 있다”면서 “오히려 사적 감정에 출발하여 멸시에 대한 반감으로 서민층들의 지지를 받았다가 양반들에게도 위세를 과시하는 이재수, 그러나 관에 대한 도전에 나서지 못했던 이재수, 천주교에 대한 무차별적 복수를 행하는 왜곡된 도민 세계, 이중수탈을 받던 교인들이 신부와 결탁하여 위세를 과시하는 이중성을 그렸으면 좋았을 것”이라고 지적했다. 주진오(2004), 「한국 역사영화의 성과와 한계」, 상명대학교.
     

      그럼에도 박광수는 서사를 한 인물이나 특정 사안에 집중시키는 것과 같은 전략을 택하지 않았다. 어쩌면 이는 박광수 나름의 ‘작가주의’를 지켜보려는 소신일 수 있었다. 박광수는 2007년 과거를 회상하며 “<이재수의 난>은 영화를 시작하던 초기부터 만들고 싶었던 작품이었다. 그때가 아니면 만들 수 없을 것 같더라. 하지만 <이재수의 난>을 끝낸 뒤 이런 영화는 마지막이라고 생각했다”고 밝혔다. 강병진, 「어느 사회파 감독의 변신」, 씨네21, 2007.04.17. <이재수의 난>은 박광수의 촬영 기법을 잇는 영화이기도 했다. 영화의 총 컷은 180컷 정도였고, 「박광수 감독 인터뷰」, 씨네21, 2002.04.20.


     촬영 기법은 전작들처럼 롱테이크 위주였다. 또 천주교인이 성경의 말씀을 따르기보단 다시 핍박에 나서는 모순된 지점을 밝히는 과정은, 핍박과 억압의 주체가 그 누구라도 될 수 있으며 사상뿐 아니라 자칫 종교도 그 이름이란 미명 하에 인간에 대한 억압이 이뤄질 수 있음을 비췄다는 점에서 박광수의 의식적인 부분이 드러난 것이라 할 수 있겠다. <이재수의 난>은 결국 박광수가 추구하려던 바를 재차 연결하려던 노력의 산물이자, 그러나 그 산물이 대중의 평가에서 멀어지고 만 영화였다.


      이미 영화가 개봉하던 1999년은 <아름다운 청년 전태일>이 개봉하던 1995년과 천양지차였다. 영화 시장은 <쉬리>와 같은, 블록버스터이면서도 긴장감 넘치는 서사로 재편되기 시작했다. 여기에 단기 금융 자본이 끼어들면서 영화의 다양성은 퇴색의 길을 밟을 수밖에 없었다. 박광수가 설 자리도 그만큼 좁아지게 된 것이다. 영화계와 시장은 박광수로 하여금 변화를 요구했고, 영화를 제작하는 입장에서 박광수도 이에 수긍할 수밖에 없었던 상황이 되어가고 있었다. 그리하여 박광수는 장편 영화 복귀에 앞서, 여러 실험을 단행하기 시작한다. 그 첫 타자가 2000년 <빤스 벗고 덤벼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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