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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시점에 이런 것을 쓰자니 한가로운 것 같지만 어찌할 수 없어 나중에 쓰일 것을 위해서라도 남긴다. 휴가 둘째 날인 오늘, 집 근처 골목을 지나다 편의점이 눈길을 잡았다. 바로 근처에 동사무소가 만들어지고 빌라가 지어지더니 지난달만 해도 영업하던 호프집이 사라진 대신 편의점이 들어선 것이다. 이 동네에 지내기 시작한 게 2003년이었으니 당시에도 존재했던 호프집의 역사는 짧은 것이 아니었다.
계통만 보면 편의점과 별도인 호프집도 세월이 무색하게 자리를 내주고 마는데 동종 업계는 오죽하겠는가. 골목에서 슈퍼가 자취를 감췄다. 해가 거듭되면서 주변 200m 안에 슈퍼들은 편의점이 됐다. 육류, 청과 코너를 갖춘 제법 규모가 있던 슈퍼도 예외는 아니었다. 골목 소매 상권은 편의점 대표 3사가 꿰찼다.
언뜻 봐도 골목 슈퍼의 패배는 자명했다. 편의점에 비해 취급 품목도 적고, 칙칙한 내, 외관 때문에 구식으로 치부되기 일쑤였다. 또 밤엔 문을 닫아 불편한 것으로 여겨지며 동네 주민의 발걸음을 돌렸다. 편의점의 매력은 슈퍼로 갈 주민들을 끌고 왔고 앞으로도 끌어올 것이지만 거기서 공멸의 기운이 느껴지는 건 무엇인가.
오늘은 빼빼로데이. 유행에 눈 감을 수 없는 편의점은 과자업체와 짠 본사의 마케팅 전략에 수긍하고 빼빼로 구매를 유인했다. 골목 슈퍼가 흉내 낼 수 없는 위용으로 형형색색 빼빼로 선물 세트를 본사 공급처에서 사다가 진열해놨다. 그런데 이것들이 다 팔릴 것인가. 설령 팔아도 편의점이 내는 이익의 65%는 본사 몫으로 돌아가게 돼 있고, 못 팔면 재고가 생겨버려 점주의 짐이 된다.
이를 점주가 못 마땅히 여기고 발걸음이 끊긴 동네 슈퍼로 회귀할 수도 없는 처지. 결국 작은 파이 '35%'를 물어든 점주는 많이 팔아야만 생존을 이어갈 수 있다. 본사는 비대해지는 데 점주는 망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할 수밖에 없다. 이 동네엔 호프집 밀어내고 편의점 한 곳이 더 생겼으니 경쟁마저 더 격해질 것이다. 그렇게 악순환이 돌고 돈다.
슈퍼의 전멸과 함께 동네 물가는 덤으로 꿈틀거린다. 음료를 비롯한 가공품 가격은 동네 주민이 운영하던 슈퍼보다 편의점이 수 백원 비싼 편. 편의점에 1+1 같은 할인 품목도 있지만 제한적일뿐더러 하나를 더 사야만 적용되는 할인이다. 발품 좀 팔아서 값싼 슈퍼를 찾아 물건을 사면 되겠지만 가까운 거리 앞에 수 백원을 '기껏...'으로 여기며 둔감해지고 있는 것은 아닐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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