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BOUT ME

-

Today
-
Yesterday
-
Total
-
  • 안드레이 란코프 - 1) 서양침략 이전의 동아시아 전근대적인 사회의 모습
    쓴 기사/스크랩 2017. 10. 26. 02:11

    1) 서양침략 이전의 동아시아 전근대적인 사회의 모습

     

    1) 유교 문화권의 특성. 지정학적으로 말하면 동아시아문명 (즉 유교문화권)의 특성 중 하나는 일원중심제이다. 유럽이나중동에서 국력과 인구, 경제력 등이 대체로 비슷한 몇 개 강대국이 경쟁한 상황을 볼 수 있지만 동아시아에서중국은 통일 정권이 있으면 기타 국가가 전혀 도전할 수 없는 초강대국 이였다. 당시 유교문화권에 있었던 국제관계에대한 의식은 중국을 중심으로 하는 조공외교론이다. 조공외교는 국가의 평등 및 주권을 인정하지 않지만 예속관계를 의미하지 않을 수도 있었다. 조공 외교 때문에도 청나라의 국력 때문에도 기타 사회 문화에 대한 무관심때문에도 청나라 지배계층은 새로운 유럽 침략의 위협을 과소평가하였다.

     

    2) 청나라 말고 유교문화권에 속한 소국들(한국, 일본 등)은 비동아시아 문화에 대한무시가 중국만큼 심하지 않아서 한국에서 실학파, 일본에서 화란학파 등이 서양 문명에 관심을 가졌다.그들은 특히 서양 기술, 자연과학, 의학 등을어느 정도 배웠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한문 문화가 주류 담론과 세계관을 지배하는 조건하에 이러한 지식이 주변적일수밖에 없었다.


    3) 중국과의 무역. 1700년 이후 영국을 비롯한 서양 상인들은 중국廣州市에서 임시 체류권을 얻었다. 그러나 무역에 대한 제한이많았다. 광주에서만 중국측에 의해서정해진 중국 상인들과 무역을 했고 높은 세금을 냈다. 그래도 세월이 갈수록 무역규모가 빨리 커지고 있었다.영국을 비롯한 유럽 국가들이 주로 홍차 및 도자기를 많이 수입하였다. 그러나 중국국내 시장에서 잘 팔리는 유럽 상품을 없었기 때문에 무역 적자가 커지고 있었다. 1800년을 전후하여 영국은드디어 중국 국내 시장에서 잘 팔리는 상품을 찾았다. 이 상품은 그전에 인도와 동남아에만 재배했던 아편이다.


    4) 일본. 중국처럼 일본은 17세기 말부터 유럽과의 소규모 무역을 허락했지만 통제, 제한하였다. 일본의 경우 이 무역을 할 권리는 네덜란드에 의해서 독점되었다. 19세기에 들어와 약소국으로전락한 네덜란드는 17세기에 근대 자본주의 선봉국가로써 영국을 능가하는 경제력을 가졌다. 그러나 중국과 달리 일본에서 유럽문화를 공부하는 화란학파가 있었다. , 일본 사회, 경제 생활을 보면 시장경제 및 시민 사회가 중국보다 많이 활발해진 것을 볼 수있었다. 그 때문에 일본은 서양 문화와의 접근을 위해 좀 더 준비한 상태였다고 할 수 도 있다.


    5) 1853년 미국의 동인도 함대 사령관 매슈 페리 제독이 밀러드 필모어 미국 대통령의 개국 요구국서를 가지고 일본에 왔다. 이에 사실상 일본 정부인 막부는 1854년 미일화친조약에 이어 1858년에는 미국을 비롯하여 영국, 러시아, 네덜란드, 프랑스와 통상조약을 체결하였다.기본 내용은 난징조약과 비슷하였다. 개항, 치외법권, 낮은 관세 등


    6) 17세기 초부터 조선은 일본처럼 무역을 비롯한 해외 접촉을 통제하거나 가로막는 쇄국 정치을 실시하였다. 1840년대에 들어와 조선에 대한 서양 열강이 사실상 본격화되기 시작하였다. 서양열강은 개강을 요구했고 또한 천주교 탄압을 막기 위한 명분으로 강압적인 태세를 취했다. 결국, 1866년의 병인양요 즉, 프랑스와 소규모 전쟁,1871년 신미양요로 알려진 미국과 소규모 전쟁까지 발생하였다. 조선왕조가 위정척사사상을 이용하여 서양열강의 침략을 막아내려 노력했다. 당시 조선 정부가 아편전쟁에 대해 알고 있었기 때문에 서양침략의 위험성을 이해했지만 서양 군사력과 국력을 과소평가하는 면이 있었기 때문에 열강 압력에 굴복하지 않으면서 독립을 지킬 수 있으리라 희망했다. 그러나 한국 지식인 계층 및 정치 엘리트들 가운데 박규수와 같이 근대화의 필요성을 이해하고 근대 기술의 도입을 바람직하게 생각하는 인물이 있었다. 박규수는 이러한 대표적인 인물이다. 그들은 쇄국정치에 전망이 없다고 판단, 외국과의 교류 시작을 불가피하며 또한 바람직한 것이라 생각했다.

     

    7) 동시에 불평등 조약 때문에 차별을 당했던 일본은 서양제국주의를 모방하여 일본식 제국주의에 대해 꿈을 꾸기 시작했다. 당시 세계의 분위기를 살펴보았을 때, 이러한 생각을 하는 것은 당연한 것이었다. 일본의 입장에서 보면, 한반도와 대만은 당연히 일본 진출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결국, 1876년에 일본정부는 강화도로 함대를 보냈다. 한국측에서도 개항에 대해서 불가피하게 생각했던 사람들은 전쟁이 발발하지 않기를 희망했다. 결국강화도 조약은 1876년에 체결되었다. 기본 내용은 난징조약과 비슷했다

    댓글

Designed by Tistor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