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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성일과 김홍준 대담 중 발췌(씨네21)리스트, 스크랩 2024. 8. 20. 09:04
정 | 김경현 교수가 지적했지만, 박광수 감독의 데뷔작 제목이 <칠수와 만수>라는 게 이상하다. 이름은 아버지가 주는 것인데, 영화의 제목부터 아버지의 호명으로부터 시작하는 것이다. 아버지의 망령은 <그 섬에 가고 싶다> <베를린 리포트>에 다시 나온다. <전태일> <이재수의 난>도 제목에서 누군가를 호명하고 있다. 이름을 부여받은 것에 대한 질문이, 이상한 방식으로 복원되고 있다. 올 초 개봉된 <나도 아내가 있었으면 좋겠다> <하루> <번지점프를 하다>도 이상하긴 마찬가지다. 이들은 모두 가족을 만드는 데 실패했다. <나도 아내가…>에서 왜 ‘있으면 좋겠다’가 아니라, ‘있었으면 좋겠다’일까. 말장난일지 모르겠지만, 그 제목이 어떤 진실을 안고 있다면, 후일담은 둘이 헤어졌다는 걸까. 예술가의 말을 믿지 말고 그 영화의 이야기를 믿으라고 했지만 한국영화는 아시아영화 속에서 UFO가 되고 있는 건 아닌지, 고아가 되고 있는 건 아닌지 싶다. 가족이 부서져도 고민의 수준이 다르다. <고하토>가 쇼크였던 게, 가족없는 집단의 가족주의가 만들어내는 힘과 자력의 관계 속에서 욕망을 이야기했다는 거다. 일본 영화감독에서 아시아감독으로 점핑한 것이다. 허우샤오시엔도 지아장케도 마찬가지다. 우리에게도 적용되는 이야기를 하고 있으니까. 한국감독은 아시아영화와 연대할 길이 요원해 보인다.
트뤼포는 ‘내가 내일 종신형을 받는다 할지라도 누군가 내가 좋아하는 영화를 공격한다면 항소장 쓰는 걸 중지하고 그 영화를 옹호할 것이다’라고 했다. 요즘은 모여서 바로 영화를 만든다. 우린 그러기까지 시간이 오래 걸렸다. 예전엔 영화를 공유했지만 지금은 영화를 창작한다. 그들이 모두 감독을 꿈꾸는 건 아니다. 만들고 틀고 자기들끼리 좋아하는 방식이다. 우리는 좋아하는 영화제목을 열거하고 애정을 고백했는데, 그러던 것이 고색창연하게 느껴질 만큼 영화광 세대 차가 벌어져 있다. 예전엔 못 본 영화제목을 기억했다가 기어이 달려가 보곤 했다. 요즘 영화광들은 못 본 영화에 대한 콤플렉스가 없다. 우리 때는 단과 급이 있었다. 누가 고다르 운운하면 또다른 이가 장 마리스트라우프를 언급하고, 그런 식의 진검승부를 했다. 구로사와를 얘기하면 7급, 오즈를 얘기하면 3급, 스즈키 세이준을 얘기하면 1급이었다. (웃음) 그런데 영화광으로의 깊이보다는 취향의 차이가 중요해지는 식으로, 지형도가 바뀌고 있다. 그건 바람직하기도 하다. 하지만 영화천국이라고 말하기엔, DVD의 고전 마켓이 형성돼 있지 않아 제한적인 얘기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정 | 7년 동안 해왔던 <키노> 편집장을 그만두고, 전주영화제를 그만두고, 지금은 아무것도 아닌 사람이 됐다. 무엇이든 할 수 있는 사람이기도 하다. 내 좌표를 다시 설정해야 할 것 같다. 내 나이에, 허우샤오시엔은 <비정성시>를 찍었더라. 반성하고 있다. 그런 작품을 지금 당장 만든다는 건 언감생심이지만, 나는 그 고민에 비슷하게 닿기라도 했는가. 며칠 전, 다시 한번 <비정성시>를 봤다. 사임이 결정되던 그 다음날. 모든 걸 다시 시작할 수 있는 힘을 주는 건, 다시 영화였다. 독자들도 그런 영화가 한편씩 있었으면 좋겠다. 지금 나이를 생각해 보고, 어떤 감독이든 그가 그 나이에 만든 영화를 찾아보고, 그 사람들과 같이 세상을 살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길 바란다.
=김홍준 | 거장들의 세기가 저문 마당에, 현존 최고의 감독을 꼽는 것은 무의미하다고 생각한다. 존 포드, 오즈 야스지로, 루이스 브뉘엘,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로베르 브레송 중 한명이라도 살아 있다면, ‘현존’ 최고의 감독으로 주저없이 꼽았겠지만. 차라리 도박하는 심정으로, 데뷔를 앞둔 아시아(동쪽 끝 일본에서 서쪽 끝 이란까지)의 모든 감독 중 미지의 그 누군가가 현존 최고의 감독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정성일 | 허우샤오시엔. 자신의 인물들에 대한 예의, 이야기를 향한 시선, 역사에 관한 근심, 그 안에서 종종 영화의 이미지조차 넘어서는 작가의 자아, 그 안에서 만들어지는 창조의 경이. 내게서 타르코프스키 이후 ‘가장 심금을 울리는’ 예술가.
-무인도에 갇혀 10편의 영화밖에 볼 수 없다면.
=정성일 | 무인도에 가지고 가고 싶기 때문에 이 명단은 ‘내 삶의 걸작’ 리스트가 아닙니다. 가지고 가서 위로받고 싶은 명단이라는 말이 더 어울릴 것 같습니다.
<성냥팔이 소녀> (바리스 바르네트) 보쉬의 그림이 내 눈앞에서 살아서 움직인다. 눈 덮인 나라에서 한 소녀가 성냥을 팔기 위해 돌아다니는 그 걸음걸이를 따라 펼쳐지는 만화경.
<어셔가의 몰락> (장 엡스탕) 에드거 앨런 포의 고딕 상상력이 인상주의 흑백 수채화 안으로 걸어들어온다. 아무 말도 없이 무성영화의 침묵 안에서 그 무언가 웅성거린다. 상상력의 하염없이 깊은 우물 안으로의 추락.
<분노의 날> (칼 드레이어) 마녀사냥 속에서 한 여자의 운명이 결정된다. 그리고 그 운명은 거스를 수 없다. 화형식의 순간 영화사상 가장 아름다운 누드 장면이 등장한다. 잔인한 예술로서의 영화에 관한 가장 매혹적인 증명의 순간.
<사야트 노바> (세르게이 파라자노프) 이미지의 양탄자. 그 모든 영화문법을 무시하고 자유자재로 상상력에 따라 이끌리는 대로 구비문학과도 같은 세상을 만든다. 또는 이야기의 폴리포니.
<부운> (나루세 미키오) 일단 한번 시작하면 도무지 중간에 멈출 수 없이 서러운 슬픈 사랑의 이야기가 펼쳐진다. 내가 알고 있는 가장 슬픈 사랑의 영화.
<산타 할아버지는 푸른 눈을 가졌다> (장 외스타슈) 도시에서의 상상력, 또는 68년 5월을 기다리는 불가능한 동화.
<이탈리아 여행> (로베르토 로셀리니) 목적없는 여행에서의 길 잃기. 그럼으로써 비로소 자기가 서 있는 장소의 역사적 인과성이 빚어낸 현실에 눈뜨기, 또는 눈을 뜨는 것이 이끌어낸 불안의 의식. 더 없이 어울리는 무인도 영화.
<낯선 여인으로부터 온 편지> (막스 오퓔스) 아직 영화가 도착하지 않은 19세기적 산문의 글쓰기 안에서 기억과 추억, 후회, 연민의 사중주가 들려온다. 두번의 세기가 만들어낸 문턱을 넘어서서 이끄는 낭만주의 마지막 환영.
<따로 또 같이> (장 뤽 고다르) 물론 이 영화가 고다르의 최고 걸작은 아니다. 어떤 순간마다 고다르는 가장 좋아하는 영화가 숨바꼭질을 벌이는데, 지금은 이 영화를 가장 좋아한다. 탭댄스를 추는 카페 장면은 내가 알고 있는 최상의 뮤지컬이다.
<남국재견> (허우샤오시엔) … 나는 이 영화가 정말 좋다.
-개인 아카이브를 만든다면, 필름으로 소장하고픈 영화 10편.
=김홍준 | 어차피 이루어질 수 없는 일이라면, 현실을 무시하고 상상의 아카이브 목록을 만드는 쪽을 택하겠다. 무순.
멜리에스의 모든 영화. 특히, 손으로 채색한 ‘원초적 컬러’ 영화의 원본들.
<2001 스페이스 오디세이> (스탠리 큐브릭), 70mm, ‘새로 뜬’ 프린트.
<아라비아의 로렌스> (데이비드 린), 70mm, 복원판, 역시 ‘새로 뜬’ 프린트
<버티고> (앨프리드 히치콕), 70mm, 복원판, 디지털 사운드 프린트.
<공산영우> (호금전), 35mm, 프린트.
<인지구> (관금붕), 35mm, 프린트.
<스토커> (안드레이 타르코프스키), 정확하게 색보정된 35mm 프린트.
<현해탄은 알고 있다> (김수영), 35mm, 복원판(잃어버린 네거티브나 프린트를 찾아낼 수 있다면…).
<바보들의 행진> (하길종), 35mm, 감독판(검열에서 잘려나간 신들을 살려낼 수 있다면…).
<만다라> (임권택), 35mm, 복원판(훼손된 네거티브를 원래의 상태대로 완벽하게 되돌려놓을 수 있다면…).
=김홍준 | “영화는 꿈이지만, 관객은 꿈꾸어서는 안 된다.”(장 뤽 고다르)
“영화는 내가 세상을 대하는 예의입니다.”(허우샤오시엔. 2000년 2월 비오는 날 타이베이 그의 집에서)
=정성일 | “나는 번번이 여기서 마지막을 맞이한다고 생각합니다. 그런데 그때마다 영화는 나를 다시 시작하게 만듭니다.”(왕가위, 2000년 서울 청담동 2046 앞 골목에서 오후의 햇살을 맞으며)
“영화가 아니면 다른 무엇을 할 수 있습니까?”(지아장케, 1999년 베이징을 떠나기 전날 그의 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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