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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주신구라>, ‘죽음’을 어떻게 대할 것인가(2017)
    영화 2020. 4. 30. 22:28

      삶과 죽음의 경계선에서 인간은 오래도록 번민을 거듭했다. 윌리엄 셰익스피어 작품에서 햄릿이 ‘사느냐, 죽느냐 그것이 문제로다’라고 말한 것처럼, 생사를 선택하는 건 인간의 난제였다. 인간은 본디 죽음을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죽음은 한 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미지의 영역이다. 사후 세계를 전해 듣고 이승으로 돌아와 말해준 인간은 지금껏 찾아보기 어려웠다. 이승과 사후의 단절은 죽음에 대한 두려움을 한층 고양한다. 어떤 문제를 정면 돌파할 때, ‘죽기 살기로 각오한다’는 말이 입길에 굳어진 것은 죽는다는 행위가 극도의 도전을 요구한다는 것을 사뭇 방증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인간은 불멸의 존재가 아니다. 태어나면 무릇 죽게 돼 있다. 그러나 죽음의 흐름을 거슬러, 인간은 “죽어보겠다”며 죽음에 의지를 표명하기도 한다. 삶을 포기하고 죽음을 내걸 만큼, 인간이 죽음에 발길을 내딛으려하는 이유는 뭘까. 거기엔 이승에서 겪은 비루함으로 인한 결단, 살아갈 의욕을 꺾을 정도의 치욕적 경험, 제 한 몸 불사라 타인을 구해보겠다는 숭고하고도 이타적인 행위, 정말 죽기 살기로 심기일전의 태도로 일에 나서려는 경우들이 있을 것이다. 그 결심의 속살이 어떠하였든, 인간의 죽음엔 ‘명예’가 결부되어 있음을 부인하기 어렵다.

      자존과 치욕의 갈림길에서, 전자를 택하고 몸을 내던지려는 행위는 역사의 단골 소재다. 조선 인조 시기, 남한산성에서 척화와 화친이 격돌하거나 한국이 일본에 병합이 될 때 자결로 치욕을 내보려 했던 선조의 모습에서 우리는 명예가 죽음의 그 이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게 된다. 비단 우리 역사뿐 아니라 명예를 중시하며 죽음을 망설이지 않았던 행위는 어쩌면 인류 역사가 추동하는 밑배경이 되었을 만큼 유서가 깊은 것이다. 숱한 전란과 전란에서의 승리를 위한 투쟁, 죽음보다 대의를 앞세우려 했던 인간의 모습은 명예와 죽음을 섞으며 그 의지를 몸소 보여주려 했던 것이다.

    죽음을 대하는 자세

     


      그러나 죽음이라는 건 어디까지나 개별적 판단에 의한 것이 되어야 하지 않을까? 대의만을 앞세워 집단적으로 죽음을 강요하거나, 특정인에게 죽음을 부추길 순 없는 일이다. 지금이야 그런 얘기들이 보편타당하게 들리지만, 시곗바늘을 잠시만 돌려봐도 그러지 않았다. 벌어진지 100년이 채 안 된 2차 대전, 인류에 전체주의가 음습하더니 얼마나 많은 이들을 사지로 몰아갔던가. 그리고 그 이전의 역사도 죽음에 앞서 산다는 것에 구차하다고 폄하했던 기록이 있었다. 일본 에도 시대를 다룬 영화 <주신구라> 역시, 죽음보다 명예를 우위에 뒀던 인간의 태도가 서려 있다.

      무엇보다 대의를 중시하는 ‘나캬야마 야스베’. 무사로서 실력이 출중했던 야스베는 삼대일 결투를 승리로 맺자 대를 이을 이가 없던 야헤의 눈에 들고 호리베가의 사위가 된다. 무사의 목숨을 내놓겠다는 기백이 야스베의 인생을 튼 것이다. 야헤는 아시노가를 섬기고 있었고, 자연히 야스베도 아사노가의 무사가 된다. 문제의 발단은 칙사 대접 역을 맡았던 아사노가 접대 지도를 맡았던 키라의 뇌물 요구를 거절하면서 빚어진다. 아사노는 무사라면 으레 뇌물과 같은 요구를 거절해야 한다고 굳게 믿고 있었고, 키라는 이러한 아사노에게 모욕을 주다 결국 칼부림을 당한다.

      아사노의 칼부림은 죽음을 자초하는 것이었다. 단절된 것들을 묶어서 보면, 야스베가 삼대일 결투에 스스럼 없이 나선 것, 아사노가 무사의 기품을 내세워 키라의 뇌물 요구를 거절한 것, 아사노가 치욕을 당하자 칼을 빼든 것은 명예와 결부된 것이었고, 이 명예를 지키려 다들 희생을 기꺼이 감수했다. 영화는 희생과 명예, 두 선택지에서 명예를 주저 없이 택했던 무사의 면모를 보이며, 나 자신에 흐르는 핏물보다는 후대에 흐를 명예를 중시하는 광경을 비춘다. 그러나 영화는 명예 일변도를 단호히 거부한다. 명예는 지속되고, 삶은 유한하더라도 이승에 있는 한, 삶의 가치는 함부로 재단할 수 없을 터다. 이 대목에서 삶과 명예를 등치할 수 있을 건가를 영화는 되묻는다.

    택일의 갈림길에서 추가된 ‘삶’

      키라는 살아남고, 아사노가는 몰락의 길을 밟자 아사노가 가신들은 키라에 대한 복수를 생각한다. 복수는 다시 피를 부르고, 자신의 목숨도 내던지겠다는 의지의 표명이다. 야스베도 아사노가가 무너지는 걸 분개하며 복수에 적극 나설 채비를 한다. 더구나 떠돌이 무사 신세가 된 야스베는 조소를 받으며 치욕을 안고 복수의 칼날을 가다듬는다. 다시, 명예와 죽음, 선택의 갈림길에서 죽음으로 향하려는 상황. 그 때 생각에 빌미가 되어준 것이 야스베와 함께 키라를 복수하려 했던 군베다. 군베는 명예가 아닌 삶을 택했고, 복수를 위한 출정을 거부했다.

      군베는 야스베에게 이렇게 부르짖는다. 너처럼 강하지 못하다고. 야스베는 다인과의 결투에서도 승리를 쟁취했던 실력을 바탕으로 복수의 원한을 다졌다. 무사가 되었던 것도, 무사로 결투에 나선 것도, 결투에서 승리를 얻은 것도 자신감의 발로이자 강인함의 증표였다. 자신감은 명예와 죽음의 갈림길을 만들어놓았다. 자신감이 바닥을 긴다면 죽음에 기꺼이 몸을 내던지려는 행위는 자못 하기 어려울 것이다. 군베의 고백은 명예를 기꺼이 선택했던 야스베의 마음을 살짝 뒤흔든다. 자신의 기개가 남의 기개일 수 없듯이, 자신의 죽음을 남에게 강요할 순 없는 노릇이다. 이걸 군베가 일깨워 준 것이다.

      아사노가의 가로였던 아코우 오오이시는 한술 더 떠 살려고 하는 게 나쁜 거냐고 야스베에게 되묻는다. 죽음과 명예의 갈림길에서 삶이라는 제3의 선택지를 만든 것이다. 당장 치욕을 쓰고 삶을 택한들, 그것을 비겁하다고 말할 수 있을까? ‘와신상담’을 하여 삶의 이어감을 통해 치욕을 되갚는다면, 죽음과 명예를 맞바꿨던 행위보다 덜 나은 것인가? 군베와 오오이시의 말은 무사의 관념이었던 죽음과 명예의 경계선을 뛰어넘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야스베의 생각이 요동친 지점도 바로 이 부분이다. 양자택일밖에 없었던 종전의 야스베를 뒤흔들었고, 복수의 과정에서 또다시 살육을 경험했던 야스베는 고개를 숙인 군베에게 “죽는 것보다 남겨져 사는 게 더 힘드니, 넌 가슴펴고 살아”라고 말한다. 

      이는 삶을 명예와 죽음의 갈림길에다 제3의 길을 더해준 것으로서 산다는 행위의 가치를 고양시킨 것이라 할 수 있다. 지지고 볶으며 좌절을 거듭해도, 잠시 비루하더라도 삶이 이어가는 한, 변화의 동력과 원천을 만들어낼 수 있는 게 인간이다. 양자택일의 갈림길에서 삶을 추가한 것만으로도 영화가 보여준 가치는 적은 게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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