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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사자 서로가 마주보고 얘기하지 않는 이상, 어디선가 전해들어 인식을 해버린 사안은 실상 진실을 비껴갈 가능성을 내포한다. 전해듣는다는 건 화자에 의해 어딘가 생략이 되거나 요약이 될 소지가 있다는 것이다. 사안을 대신 전해주려는 언론의 한계가 곧 화자의 한계이다. 브리핑에서 나온 수많은 말은 거두절미 되어버리고 '격노'와 같은 자극적 헤드라인이 달려 뉴스가 된다.
여기엔 여러가지 원인이 있을 것이다. 점점 정글화되어가는 언론 생태계 가운데 트래픽을 늘리려는 언론 나름의 몸부림일 수 있고, 뉴스 소비 시간의 감소로 인해 짧은 내용을 가지고 최대한 '이슈화'를 해보려는 언론의 자구책일 수도 있다. 혹은 일종의 '각' 살릴 내용이 아니면 모두 버려야 하는 기사 문법의 한계에서 비롯된 것일 수 있다.
그 원인이 어찌되었건 이미 언론의 보도는 사안의 진의와 별개라는 인식이 자리잡고 있다. 화자의 한계에 봉착해버린 언론은 '자기 성찰'을 넘어서 '자기 파괴'를 고민해야 할 시점이 왔다. 예컨대 '야마' 아닌 내용을 버리는 기사의 현행 틀을 깨는 건 기존 기사 형식을 허물거나 변조하지 않고선 어려운 얘기다. 또 정형화된 뉴스를 고집한 나머지 결국 사실이 아닌 곳으로 이탈해버는 뉴스 소비층을 고려하면 또다른 파괴를 고민할 수밖에 없다.
기사를 쓴다는 건 사실을 향한 여정이자 사실을 선택한다는 이중의 행위를 담고 있다. 이러한 기사의 한계를 수긍해오면서 독자가 사실에 근접하도록 언론은 여러 형식의 기사를 만들어왔다. 그것은 천편일률 서술의 파괴, 기사 길이의 자유화 등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아직 미지의 영역이다. 파괴적 행동이 난마 상태인 언론의 미래에 답을 준다는 건 아니다. 다만 한줄기 섬광이라도 비출 수 있다면 이에 대한 고민은 불가피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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