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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체리향기(1997)와 관습
    영화 2020. 5. 10. 22:48

    살면서 경계할 것은 많지만 ‘관습’을 논하지 않을 수 없다. 살면서 무수한 관습을 마주한다. 가령, 이런 상황에선 행동은 그렇게 해야 한다는 뻔한 애기들. 관습이 나쁜 것만은 아니다. 관습에 의지하지 않는 삶은 어쩌면 피곤하다. 관습에 벗어나려 매 순간 행동과 판단을 바꿔보려 한다면 머리가 아마 아플 것이다. 그럼에도 경로가 관습에 의존적이라면 결정적 순간에는 해를 입을 수 있다. 이미 밥벌이를 하기 위해, 자기소개서를 내는 그 순간부터 관습에서 탈피하라는 말을 듣고 있다. 월급을 받는 순간에도 관습에서 벗어나라는 명령은 유효하니 관습이 어느덧 삶의 위협적인 요소가 됐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간관계에서도 관습은 위험하다. 사람을 으레 가늠 짓고, 판단하는 것, 이 또한 관습이다. 매사 모든 사람과 사물을 신경 쓸 수 없으니 회피의 일환으로 관습을 택한 결과일 것이다. 그러나 관습으로 점철된 세상은 너무도 삭막하지 않을까. 사람에 대한 개별적인 판단을 무르고, 범주화된 판단으로 사람을 논한다면 ‘그 대상이 될 사람은 얼마나 한편으로 괴로울까’란 생각에 미치면 관습에서 얼른 벗어나고픈 마음도 드는 게 사실이다. 물론 사회적으로 관습이 자리 잡는 데 최적화된 것은 삶의 피곤함이 가중되기 때문일 것이다. 관습이 제 아무리 위험하다 하더라도 관습을 쉽사리 무르기 어려운 이유이기도 하다.

     


      그러나 경계의 범주 안에 들 필요는 분명 있다. 삶이 노곤하다는 이유로 경계하려는 자세마저 누그러뜨린다면 우리가 열망하는 공존의 세상은 찾아오지 않을 것이다. 영화 <체리 향기>는 어쩌면 관습에 경고를 날리는 이야기다. 바디(호먀윤 엘샤드)는 차를 타고 거리를 배회한다. 그러다 눈길을 잡는 이가 있으면 태워 이야기를 나눈다. 바디가 주로 거는 질문은 이를테면 무슨 일을 하는 지다. 질문 자체는 관습적일 순 있어도 대답은 관습적일 수 없다. 무슨 일을 한다는 것은 모두가 동일할 순 없기 때문이다. 바디의 질문은 관습에서 벗어나보려는 노력일 수 있다.


      다만 불길한 점은 바디의 행선지가 구석진 곳이며, 자신을 묻어달라고 종국엔 요구한다는 것이다. 조건도 붙었다. 돈을 준다는 제안과 함께. 영화를 보는 당초, 요구에 응한 이를 오히려 바디가 죽이지 않을까란 생각도 들었던 게 사실이다. 뭣 하러 ‘돈을 주면서 자기를 묻어 달라 했을까’란 생각이 들었고, 마치 사이코패스처럼 미끼를 흘려 죽이려는 의도에서 그런 게 아니겠는가라는 섬뜩한 생각도 스쳤다. 그러나 이 역시 영화가 함정을 파놓을 것이란 관습적 흐름에 의존한 생각이었음이 드러난다. 바디는 흔들림 없이 자기 목적, 즉 생을 마감한다는 그 방향을 향해 우직하게 차를 몰고 있었을 뿐이었다.


      돈을 준다곤 했지만 요구에 순순히 응하는 이를 찾기란 쉽지가 않다. 처음 차를 탄 군인은 버디에 경계의 눈초리를 보내고, 신학도 역시 버디의 요구를 거부한다. 돈을 아무리 거액을 준다 해도 자신의 손으로 사람을 파묻기란 쉽지 않을 것이다. 그럼에도 버디는 파묻어줄 사람을 찾으러 운전대를 좀처럼 놓지 않는다. 이것은 버디의 결연한 의지로 해석해볼 수 있다. 한 번도 아니고, 두 번의 좌절에도 버디는 생을 마감하려 동분서주한다. 그리고 생을 마감하는 방식도 자해를 통한 방식이 아닌, 누군가 나를 죽이는 것이다. 버디가 이런 조건을 설정한 것은 애초 사람을 만나겠다는 구상과 결합한 결과이다.


      버디의 조건은 관습적이지 않다. 대개 자신의 선택, 의지로 생을 마감하기는 하지만 타인의 손을 빌려 생을 마감하려 하지는 않는다. 그것은 자살이라기보다 타살에 가깝기 때문이다. 타살이면서도 자신의 의지로 자살을 감행하려는 부분에선 관습이라기보다 생경하게 다가온다. 너무도 생경해서 영화를 보는 나도, 버디의 차를 탄 군인과 신학도도 반신반의하게 되는 것이다. 버디는 굳이 ‘왜 이런 행로를 택했을까’란 의문과 함께. 관습에서 벗어난 덕분에 버디의 생은 늘게 되었다. 생을 마감하는 방식에도 관습이 더해졌다면 바로 생을 마감하려 들었을 것이다.


      그러나 버디의 요구에 군인도, 신학도도 관습의 대응으로 일관한다. 사람은 내 손으로 죽일 수 없다는 것, 어쩌면 누구나 으레 대답할 수 있는 얘기다. 나는 차마 죽일 수 없다는 것. 깊게 생각할 것 없이 신앙의 원리로, 도덕과 윤리의 원리로 간결한 결론으로 이르게 되는 관습의 결과물이다. 그러기에 군인은 버디에서 달아나려 하고, 신학도는 버디와 애써 함께하려고 하지는 않는다. 죽는다는 것은 비윤리적이고, 더구나 죽임을 한다는 건 납득하기도 어려우니 버디의 말은 귀 기울일 필요가 없다는 게 이들의 관습적 대응이다.


      이들에 쓴 소리 할 입장은 아니다. 나를 포함한 군인과 신학도 역시 관습에서 벗어나려면 나름의 결단을 해야 한다. 버디를 끈덕지게 믿어보고 얘기를 끊임없이 하려 한다거나, 삶을 마감하는 방법 외에 다른 대안을 제시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려면 평소보다 많은 노력이 요구된다. 무엇보다 관습에서 벗어날 유인이 없는 상황에선 관습의 반복에서 벗어나기는 어렵다. 매사 그럴 만한 용기를 갖추기는 매우 어렵다. 그래서 군인과 신학도의 판단에 무턱대고 지적을 할 수가 없다. 다만 버디가 요구했던 그 일이란 생을 마감하는 행위였다. 이 대목에선 관습에 벗어날 판단을 할 순 있지 않았을까. 그래서 군인과 신학도의 행동에 아쉬움이 드는 것이다.


      반대로 박물관에서 일하는 노인은 관습적 행위에서 벗어나려 한다. 체리 애기를 꺼내며 삶의 소중함을 버디에게 애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끈질겼다. 단절된 파편의 얘기들이 아니었다. 연속된 이야기로 삶의 욕구를 자극했다. 군인과 신학도로부턴 찾아볼 수 없는 모습이었다. 물론 노인은 버디의 요구에 응한다. 이 역시 관습을 깨는 행위이다. 삶을 마무리 하는 데 자기 손으로 돕겠다고 약속을 한 것이다. 다만 전제 조건이 붙기는 했다. 노인이 흙으로 묻으려 할 때까지 버디는 삶의 의욕이 없어야 한다. 그러나 노인은 삶의 의욕을 부추긴다. 상충과 관습을 깨는 연속이다.


      버디가 구덩이 안에 몸을 뉘일 때 천둥이 치고, 비가 오려 한다. 버디의 얼굴은 결연함 대신 두려움이 스친다. 몸도 뒤척인다. 이것은 반대로 생의 의지일 수 있다. 영화는 열린 결말로 마무리되지만 가능성에 비춘다면 사는 쪽이 높아 보인다. 굳이 결말을 단정할 순 없겠지만 감독은 관습의 타파로 삶의 변화를 이룰 수 있다는 의사를 영화로 그려냈다. 버디는 생의 마감을 위해 열렬히 달리다가 뜻밖에 관습에서 벗어난 말을 듣고, 흔들린다. 결국 누웠기는 했지만 생을 마무리 짓겠다는 의지도 일정 부분 가시고 말았다. 우리 모두에게 관습을 벗어나라 요구할 순 없다. 그러나 감독은 노인의 말을 빌려 최소한 삶의 대목 구석구석에선 관습을 타파하라는 조언을 하고 있다. 그것이 나에겐 득이 되지는 않을지언정 누군가의 삶을 구해낼 수 있다면, 변화시킬 수 있다면 충분히 시도할 만한 행동 아닐까.


      생에 대한 감독의 생각은 메이커필름을 영화와 연결시킨 대목에서도 엿볼 수 있는 것 같다. 제작 과정을 영화에 포함시킴으로써 이 또한 관습에서 벗어남과 함께, 영화의 내용이 마냥 허구가 아닌 생의 현실과 맞닿아 있음을 드러내고 있는 듯 보인다. 그래서 사뭇 이질적으로 보일 수 있는 맥락이 비교적 일체감 있게 느껴지는 이유일 것이다.


      영화 속 버디는 일상에서 친밀하게 애기를 나눌 대상도, 삶의 고민을 풀어놓을 대상도 잘 보이지 않았다. 버디를 만난 이들이 관습적으로 대응한 결과일 수 있다. 삶의, 일상의 고민을 늘어놓았건만 의례적으로 대하는 데서 삶의 의욕을 멈췄는지도 모른다. 비단 버디만의 사례는 아닐 것이다. 바쁜 일상 속, 상처 받기 쉬운 사회 가운데 관습의 영향력은 커지고 있고, 버디의 경우 또한 늘어나고 있다. 안타깝게도, 자살률이 1위라는 불명예는 만연한 관습에 기인한 것이 아닌가란 생각도 든다. 감독은 대화를 통해, 말미 구성을 통해 관습에서 벗어나자는 읊조림을 하고 있다. 한 개인의 관심으로는 될 수 없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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