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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04호] “남들이 알면서도 못하는 분야에 도전하라” 정관영 변호사쓴 기사/학보사 2014. 3. 4. 00:37
‘IT 전문 변호사’에 도전하는 법무법인 정률 변호사, 정관영(법·94학번) 동문
정관영 변호사의 어릴 적 꿈은 게임개발자였다. 그러나 아버지는 아들이 법조인이 되길 원했다. 재밌는 게임을 만들고 싶어했던 정 씨는 부모님의 강한 의향으로 진로의 방향을 틀기 시작한다. 대학 전공을 법학으로 선택한 것이다. 5년여의 수험 기간 끝에 정 동문은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다. 그러나 정 씨의 어릴 적 이루지 못한 꿈은 변호사가 되고서도 영향을 미쳐, 결국 IT 전문 변호사로의 도전을 이끌어 냈다.
“전공을 법학으로 선택하고 변호사로 일하다 보니 전문영역을 정해야 했다. 그래서 건설, 부동산, M&A(기업 인수합병) 등 여러 분야를 물색해봤는데 이미 그 분야에 자리를 잡고 계신 분들이 많이 있었다. IT 쪽을 보니 변호사들도 적고 흥미도 맞아 도전하게 됐다. 중고등학교 시절, 게임을 좋아하고 컴퓨터 만지는 것을 좋아했던 것과 관련이 있는 셈이다.”
정 씨는 지난 2010년부터 ‘IT 전문 변호사’가 되기로 마음먹고 12년부터는 한 사이버 대학에서 정보통신을 전공하고 있다.
- 왜 IT인가?
미래에는 ‘connector’(커넥터), 즉, 연결자의 역할이 중요하다. 전문가 층이 워낙 두꺼워져서 어느 한 분야만 파서는 전문가로 인정받지 못하는 세상이 도래했다. 그래서 법률 전문가의 타이틀을 넘어 ‘IT 전문 변호사’라는 커넥터가 되고자 한다.
IT는 매우 변화가 빠르고 기술적인 이해를 필요로 하는 업무 영역이다. 아직 우리나라에는 법률과 IT, 두 분야를 잘 안다고 할 만한 전문가는 거의 없다. 변호사 입장에서는 진입 장벽이 상당히 높은 분야라 할 수 있다.
누군가 얘기하기를 ‘남들이 몰라서 안 하고 있는 분야가 아니라 남들이 알면서도 못하고 있는 분야에 집중하라’고 하는데, 맞는 말이다. 남들이 몰라서 안 하는 분야를 개척하면 처음에는 앞서나갈 수 있겠지만, 후발 주자들이 금방 추격해 따라붙으면서 레드오션으로 바뀌어 버린다. 그러나 남들이 알면서도 못하는 분야는 진입 장벽이 높아, 일단 개 척하고 나면 후발 주자들이 여간해서는 따라 붙지 못하므로 블루오션이라 할 수 있다.- 대학 시절, 고시 도전 과정은 어땠는가?
오랜만에 대학시절을 되새겨봤다. 1~2학년 때는 무엇을 해야 할지 몰라서 평범히 수업만 들으며 생활했다. 그런데 주변에 있던 복학생 선배들이 공부한다면서 도서관에 다니더라. 그래서 사법시험 공부를 해야 하나 막연하게 생각은 했는데 공부는 그리 열심히 하지 않았다. 법학과의 민사법학회에 가입해 MT도 가고 세미나도 하는 등 학회 활동을 활발하게 한 것도 기억에 남는다.
2학년 2학기를 마치고 군대에 가야 할지, 아니면 한 살이라도 어릴 때 사법시험 공부를 해야 할지를 놓고 고민했다. 고민 끝에 입대를 미루고 사법시험을 준비하기로 했다. 지금도 있는지는 모르겠으나, 당시 학교 2번 버스 종점 근처에는 ‘정릉고시원’이라는 곳이 있었다. 방도 하나밖에 없는 허름한 곳이었지만 그 곳에서 숙박을 해결하기로 정했다.
매일 새벽 5시에 일어났다. 따뜻한 물이 나오지 않아 찬물로 세수하고 성곡도서관에 가장 첫 번째로 자리를 잡아 도서관이 문을 닫는 시간까지 공부했다. 이후 고시원에 돌아와 자정에 자는 생활을 매일 반복했다. 또 학교 교과과정과 시험 공부를 어떻게 병행할까를 고민했는데, 일주일 중 수업을 이틀로 몰아 집중적으로 듣고, 나머지 날은 시험 공부를 하는 데 주력했다. 3학년을 마치고서는 휴학을 하고 신림동 고시촌에 들어가 학원 강의도 들으며 집중적으로 공부했다.
- 그렇다면 고시 준비를 3학년 때부터 한 것인가?
그렇다. 1년간 열심히 한 덕분인지 98년 초 1차 시험에 처음으로 합격했다. 이때 기쁨은 최종 합격했을 때 기쁨보다 더 컸던 것으로 기억한다. 그동안 막연했던 가능성이 현실로 나타났기 때문이다. 99년 2차 시험을 치른 뒤 8월에 졸업을 했다. 그런데 그 해 11월 합격자 발표에서 불합격한 사실을 확인하고 하늘이 노랗게 보이는 경험을 하게 된다.
마음을 추스르고 00년 1차 시험 준비에 나섰지만, 신림동 독서실에 있던 교재를 누군가가 훔쳐가고, 설상가상으로 독감에 걸려 열흘간 앓아누우면서 심적으로 많은 고생을 했다. 결국, 1차 시험에 낙방하고 다시 공부를 시작했다. 다행히 01년 1차, 2차 시험을 연달아 합격해 예비 법조인의 길을 걷게 됐다.
- ‘공부 방법과 합격 전략’이 궁금하다.사법시험은 공부해야 할 분량이 많다. 이는 공부한 것을 시험장까지 정확하게 가지고 들어갈 수 있는 분량이 한계가 있음을 뜻한다. 시험의 속성상 대충 아는 것보다 아예 모르는 게 더 나을 수 있다. 그래서 시험에 나오는 부분을 집중적으로 공부해 생생한 기억을 최대한 시험장에 가져갈 수 있는지가 관건이다.
그러기 위해 과목별로 단권화를 진행했고, 오답노트를 만들어 시험 전날 모든 시험 범위를 훑어볼 수 있도록 했다. 1차 시험의 경우 시험 50일 전에 모든 시험 범위를 4회독을 할 수 있으면 합격이라 생각하고, 마지막 50일을 위해 교과목들을 단권화하는 공부를 반복했다. ‘4·2·1 전략’이라고 해서 4주 동안 1회독, 그 다음 2주 동안 1회독, 그다음 1주 동안 1회독을 하면 7주, 즉 49일이 지나간다. 마지막 50일째에는 하루 동안 전 과목을 1회독하고 그 다음 날 시험장에 들어가는 식이다.
- 변호사로 활동하면서 잊지 못할 사건이 있을 것 같다.
변호사 일을 하면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잘 안 됐던 일이 기억에 남는 경우가 많다. 예전에 재개발조합 조합장에게 뇌물을 준 범죄로 구속된 피의자를 변호한 적이 있었다. 최선을 다했지만, 피고인에게 유죄가 선고됐다. 미안한 마음이 가득했다.
그런데 1년여 형을 살고 나온 그 피고인이 나에게 연락을 해왔고, 이후 몇 번 만나 술도 한잔 할 정도로 친한 사이가 됐다. 내가 ‘나는 당신 사건을 성공적으로 해결하지도 못했는데 왜 연락을 해오셨냐’고 묻자 ‘보통 유죄 판결이 나면 변호사가 피고인을 찾아오는 법이 거의 없는데, 자신을 찾아와 이런 저런 얘기를 나누면서 인간적으로 대해준 점에서 고마움을 느꼈다’고 했다. 지금은 그 사람이 재기하는 데 도움을 주고자 노력 중이다.
- 2012년 서울시장 선거 ‘디도스 사태’ 수사에도 참여했다.
2010년부터 IT 전문 변호사를 지향하던 중 대한변호사협회로부터 선관위 디도스 특검의 특별수사관으로 일할 변호사를 모집한다는 메일을 받게 됐다. 특별수사관으로 일하는 것은 본인이 지향하는 ‘IT 전문 변호사’ 경력에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단 특검팀에 지원할 변호사들이 많을 것으로 생각해, 별 기대 없이 이력서와 간단한 자기소개서를 메일로 보냈다. 그런데 이틀 후, 특검팀에서 면접을 보러 오라고 해, 당시 특별검사였던 박태석 검사를 찾아가 간단한 면접을 봤다. 그리고 특별수사관 두 명 중 한 명으로 뽑혔다. 나중에 알고 보니 특별수사관에 약 서른 명 정도가 지원했다고 하더라. 당시 질문이 수사 ‘보안’을 지키는 것과 수사하면서 상사와 이견이 있을 때 어떻게 하겠는가의 위계질서에 관한 것이었는데 대답한 내용을 마음에 들어하신 것 같다.
- 어떤 수사를 하게 됐는가?
우리나라는 경찰과 검찰이 중요한 수사권을 쥐고 있다. 그런데 특검은 수사기관을 못 믿겠다는 것이다. 국회에서 여야 의결로 법을 통과시켜 특별 검사를 임명한다. 특별 검사와 관련된 법에는 수사 범위가 정해져 있다. 디도스 사태의 수사 범위로 첫째는 선거관리위원회 홈페이지에 대한 디도스 공격의 윗선을 밝히는 것, 둘째는 이 사태에 대한 은폐 조작의 행위가 있다면 처벌하자는 것, 셋째는 중앙선관위에서 선관위 내부 데이터베이스에 접속을 못 하도록 한 내부 공모자를 조사하는 것이었다.
- 세간에선 디도스 특검이 의혹을 철저히 밝히지 못했다는 이야기가 오갔다.
대표할 수 있는 자격은 아니지만, 수사 자체는 최선을 다해서 했다. 특별검사가 만들어지는 과정에는 정치적 이해관계가 많이 얽혀있다. 실체가 실제로 존재하고, 의혹을 밝혀낸 특검도 물론 있다. 그러나 실체가 없는 특검도 있었다. 의혹은 있어 특검을 하는 것의 의미는 분명히 있지만, 수사를 하다 보면 실체가 없기도 한다. 이는 특검을 주장하는 측에선 잘 받아들여지지 않는다. 제대로 못 했다는 시각으로 결과를 정해놓고 보는 경향이 있다. 변호하는 것처럼 됐지만 그런 측면은 이해해 달라.
- ‘법조계’를 향한 불신은 어떻게 보는가?
우리나라는 해방 이후 수십 년간 해마다 법조인을 수십 명 정도만 배출해와 ‘법복 귀족’을 양산해왔다. 법조인 수가 적다 보니 각종 특권이 법조인에게 집중되고, 국민이 바라볼 때 변호사 사무실의 문턱이 높아진 게 사실이다. 이 와중에 국민의 의식은 높아졌지만 법조인의 의식은 과거에 머물면서 법조비리가 속출하고, 결국 법조계 전반에 대한 불신이 높아지게 됐다고 생각한다.
해답은 법조인들 스스로 변화의 몸부림으로 환골탈태해야 한다는 것이다. 2000년대 들어 한 해 배출되는 법조인이 1000명으로 늘었고, 2010년대부터는 로스쿨 제도가 도입되면서 한 해 약 1500명 이상의 법조인이 배출돼, 과거와 같은 특권은 있을 수 없는 시대가 됐다. 법률도 서비스업의 성격을 강하게 띠기 시작하면서 법조인의 서비스 의식도 상당히 높아지고 있기 때문에 법조계에 대한 국민의 인식도 점차 좋아질 것으로 예상한다.
- 우리학교 학생들에게 당부 말씀 부탁드린다.
그런 이야기들을 한다. 패기가 없다, 꿈이 없다. 기성세대가 젊은이들을 그렇게 보는 것인지 아니면 젊은이들이 사회 구조적 문제들로 자신감을 잃고 위축됐는지 모르겠다. 현재 기성세대가 만들어 놓은 시스템에서 살아남기 위해 좋은 스펙으로 어딘가에 일자리를 잡고, 그런 시스템에서 살아남고자 노력하는 것만으로 20대를 보내는 것은 너무 안타깝다. 여러분들이 힘드신 것은 알지만, 적어도 20대의 패기는 있어야 한다고 본다. 30대까지도 그렇다. 어떤 실패를 해도 다시 일어날 수 있는 시간과 젊음이 있고 실패를 자신의 자양분과 배움으로 승화시킬 수 있는 무궁무진한 시기가 바로 20대다. 어떤 불합리한 사회 구조가 있다고 하면 목소리를 낼 수 있는 최소한의 여유가 필요하다.고동완 기자
kodongwan@kookmin.ac.kr'쓴 기사 > 학보사'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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