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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어차피 신고해봤자...' 아내를 위해, 분노한 남편의 선택
    생각/영화 2017. 6. 14. 01:43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27918


    [리뷰] 칸 영화제 각본상 및 남우주연상을 수상한 영화 <세일즈맨>

    [오마이뉴스고동완 기자]

    * 이 글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영화에서 '복수'란 주제는 사실 특별한 게 아니다. 상당수 영화들이 권선징악을 따르고 있는 데다 굳이 선악 대결이 아니더라도, 인물들 간의 충돌과 복수는 영화 속 일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기 때문이다. 다만 주목해야 할 것은 복수가 일어난 동기가 무엇이며 그에 따른 결과는 무엇이냐는 점이다. 그것이 대립과 복수란 흔하디흔한 구도를 희석시켜주기 때문이다. 

    영화 <세일즈맨>은 범인을 찾아서 망신이라도 주려는 어느 한 개인의 행동을 좇아간다. 피해를 당한 뒤 복수를 감행한다는 다소 익숙한 구도를 띠지만 복수를 유발하는 사회상과 인간의 내면을 천착해볼 수 있다는 점에선 영화는 진부하지 않다. 

    다가구 건물이 붕괴할 조짐을 보이는 것으로 영화는 시작한다. 아닌 밤중에 건물이 흔들리더니 벽면에 금이 가고, 건물에 살던 사람들은 속절없이 대피한다. 거기에 연극단에서 배우로 활동하는 에마드와 라나 부부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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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세일즈맨> 포스터
    ⓒ (주)팝엔터테인먼트


    전혀 작동하지 않는 공적 영역 

    장면은 무너지려는 건물 옆에서 아랑곳없이 작업 중인 굴착기로 초점을 옮긴다. 건물 주변의 공사로 지반에 손상이 가는 바람에 건물이 흔들렸을 것이란 추측을 낳게 하는 대목이다. 그러나 어느 누구도 공사 현장에 항의를 하지 않는다. 주민들은 마치 어찌할 수 없다는 듯이 무너지는 건물에서 대피만 하고 제대로 된 항의 하나 하지 않는다. 그렇게 에마드와 라나는 당장 살 거처를 잃어버리고 만다. 부부는 그것을 순응적으로 받아들이고, 연극단 동료의 도움을 받아 빈집으로 살 곳을 옮긴다. 이것이 복수의 단초를 제공한다. 

    어느 날, 라나가 샤워하려고 할 때 신호가 울리고 라나는 남편 에마드인 줄 알고 망설임 없이 문을 열어준 뒤 욕실로 들어간다. 곧 라나가 장면에서 사라지더니 에마드의 발걸음 속에 핏빛이 바닥에 보인다. 라나가 열어준 문을 통해 어느 괴한이 잠입한 뒤 라나의 머리를 사정없이 때렸던 것이다. 

    이쯤 되면 범인을 당장 경찰에 신고해서 일벌백계해야 하는 것 아닌가라는 생각이 들 수 있는데, 이 부부는 생각을 달리한다. 정작 피해자 라나는 경찰에 신고하는 걸 원치 않고, 에마드 역시 경찰의 도움을 받기보단 자력으로 범인을 찾아 나서려고 한다. 굳이 공적 영역에 기대지 않으려 하는 데엔 이웃의 말에 힌트가 담겨 있다. 

    이웃은 라나에게 오히려 경찰에 신고 안 하길 잘했다며 거든다. 어차피 신고해도 소용이 없고 괜히 법정에 들락날락해봤자 얘기 안할 것까지 하게 된다는 것이다. 라나는 욕실에서 화를 당했고 범인은 남자였다. 빈집의 이전 세입자는 어느 한 여성이었는데, 여럿의 남자들과 연분을 맺었다고 한다. 범인이 이전 거주자였던 여성과 알고 지냈을 거라고 추정만 할 뿐이다. 이 이웃은 라나가 당한 것이 자상을 남기는 폭력을 넘어 성적 침해로까지 연상될 수 있다는 걸 우려했던 것으로 보인다. 더구나 영화의 배경은 이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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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세일즈맨>의 한 장면
    ⓒ (주)팝엔터테인먼트


    피해자가 모든 걸 감당하는 사회 

    사람이 끔찍한 상해를 입었지만 공적 영역은 여전히 작동하지 않게 됐다. 당한들 항변할 수 없는 사회적인 분위기로 인해 개인에게 책임이 돌려진 채로 말이다. 거처를 잃은 것도 모자라 괴한에게 피습당하고도 자력으로 딛고 일어서야 한다. 사법이라는 공적 테두리를 찾아볼 수 없게 되니, 범인에 대한 심판 또한 개인의 몫으로 환원시켜버리는 결과를 낳고, 직접적 복수의 계기를 만들고 만다. 

    영화 <세일즈맨>은 박찬욱 감독의 '복수 3부작' 중 <복수는 나의 것>과 결말은 달라도 구조가 상당 부분 중첩된다. 하소연할 데 없는 사회 구조 속에 주인공이 덫에 빠지고, 거기에 헤어 나오려 발버둥 치다 누군가를 표적으로 삼게 되는 상황 말이다. 구조 하부에 부속품처럼 놓인 개인의 힘은 언제나 미약하고, 미약한 힘으로 어떤 결과가 나오든 본인이 짊어질 몫이 되어버리고 만다. 그렇게 연대는 끊기고, 끔찍한 각자도생의 문이 열린다. 

    '복수 3부작' 주인공들은 하나같이 오롯이 혼자서 인고하다 복수를 했다. 그런데 결말은 유쾌하지 않았다. <복수는 나의 것>에서 동진(송강호)은 비참한 말로를 맞이하고, <올드보이> 오대수(최민식)는 혀가 잘린 상태에서 편지로 최면술사에게 기억을 지워달라고 요청한다. <친절한 금자씨>에서 금자(이영애)는 속죄를 구하듯, 순결의 하얀 케이크에 얼굴을 거듭 파묻는다. 

    복수의 끝은 어디로 

    이 세 주인공은 모두 '당했던 사람'이다. 문득, 이들 입장이 되었다고 가정해보면 복수를 필요불가결한 것으로 생각하고 '눈에는 눈, 이에는 이'를 떠올리기 쉽다. 그러나 복수의 동기와 진행방향이 불가결해보여도 벌어진 결과를 놓고 보면 복수가 꼭 불가결하진 않다는 걸 박찬욱표 3부작은 알려주고 있는 셈이다. 복수 이후 맞닥뜨리게 될 감정이 그리 유쾌하지는 않다는 건 '검은 9월단'을 그린 영화 <뮌헨> 역시 다룬 바 있다. 국가 권력에 부속되어 피의 복수를 반복하지만 돌아오는 건 불안이었다. 복수는 감정을 낳고 그 감정은 증오의 또 다른 발현이며, 우울함을 함께 낳는다는 것을 보여줬다. 

    다만 영화 <공정사회>에선 수사에 제 역할을 못하던 경찰 때문에 복수에 나선 주인공(장영남)의 행위가 체증을 가시게 한다는 시각이 많았다. 영화 속 복수에 대한 판단이 두 갈래로 나뉘는 듯한 양상을 띠고 있는 것이다. 

    애초 건물이 붕괴할 조짐이 보였을 때 부부가 다른 길로 구제를 받았다면 어땠을까? 아니면 주민들이 좌시하기보단 연대를 통해 건물 주변 공사에 대한 규탄을 했다면 어땠을까? 아마 이야기의 판도가 180도 바뀌어져 있었을 것이다. 복수를 야기한 요소를 함께 살펴봐야 하는 이유다. 

    분노한 에마드는 복수를 위해 이미 범인을 찾아 나선 상황이다. 범인을 찾아 통쾌함을 느낄 것인지, 서글픈 잔영을 남길 것인지는 독자의 몫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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