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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영화가 묻는다 "차별을 뭣 하러 하는가?"
    영화 2017. 7. 15. 18:33

    [리뷰] 차별이 상쇄되면서 단합으로 나아가는 영화 <대립군>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31352

    [오마이뉴스 글:고동완, 편집:곽우신]

    *주의! 이 기사는 영화의 스포일러를 포함하고 있습니다.

    차별은 지난한 역사의 뿌리였다. 신분제 사회와 인종 갈등은 말할 것도 없다. 과거를 조망하고 현재를 직시하고 미래를 바라본다는 게 역사라고 했던가. 말마따나 지금도 성별, 재산, 지위 등을 막론하고 각계에서 차별이 빚어지고 또 그걸 정당화하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미래에 가서도 차별이 가시기는커녕 공고화될 것 같은 예감이 드는 대목이다.

    그런데 남들보다 좀 더 배웠다고 해서, 돈을 더 많이 가진다고 해서, 내가 하지 않는 것을 남들이 한다고 해서 우위를 내보이고 무의식에 차별한들 허망한 것이다. 각 개체로서, 더불어 나아간다는 전제하에 나는 나인 것이고 너는 너인 것이니까. 차별이 가해지는 폭력은 나와 너의 경계를 흐릿하게 만들고 갈등과 증오심으로 나와 너를 진흙탕에 묶는다. 그 결론은 싸움과 각자도생뿐이다.

    그리하여 "차별을 뭣 하러 하는가?"라고 영화 <대립군>은 되묻는다. 

    뭉쳐야만 살 수 있었던 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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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영화의 배경은 임진왜란이다. 이미 한반도의 절반 이상이 왜군에게 넘어갔다. 한양도성을 버리고 떠난 임금(박호산 역)은 평양으로 피신한 데 이어 원군을 요청하겠다는 명분으로 명나라로 갈 채비를 한다. 임금이 나라에 없는데 조정이 작동될 리 만무할 터. 조정을 둘로 나눠 세자 광해(여진구 역)에게 분조를 맡긴다.

    광해는 임금의 명을 받들어 강계로 간다. 신철 장군을 만나 의병과 관군을 규합해 항전하라는 게 명의 내용이었다. 그러나 광해가 데리고 있는 관군은 거듭된 패전으로 싸워보지도 못하고 전멸할 수준이었다. 이 와중에 왜군이 사방에 깔린 때 강계로 가는 여정이 어디 쉽겠는가. 여기서 조력이 등장한다. '대립군'이다.

    대립군? 얼핏 생소하다. 역사 공부를 하다가도 무심코 지나쳤던 명칭이다. 의병도 아니고, 조명받지 못한 이들은 누구인가. 역사의 귀퉁이에 존재했던 대립군은 먹고 살려고 남의 군역을 대신했던 이들이다. 그러다 보니 신분상에서 가장 밑바닥인 이들이 많았다. 광해는 강계로 가는 동안 이 대립군에 의탁한다.

    귀천을 따지고, 신분 질서가 웬만한 걸 용납했던 그 시대. 전쟁의 풍전등화 앞에선 다 함께 뭉쳐야만 했고 뭉칠 수밖에 없었다.

    여정 가운데 변곡점을 지나는 광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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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십세기폭스코리아(주)


    여정 초반, 영화 속 광해는 왕이라는 권위, 허례허식에서 벗어나질 못했다. 주변 이들이 애꿎게 고생하는 상황에서도 걸어서 이동하지 않고 무거운 가마에 몸을 싣는다. 이런 광해도 백성의 죽음이 켜켜이 쌓여나가는 걸 생눈으로 목도하면서 변곡점을 지나게 된다. 내 목숨보다 중요한 게 책이라고 했다가 백성이 준 밥으로 바뀐 것이다.

    광해가 그토록 소중히 여기던 책은 어찌 됐을까. 광해는 병법서를 비롯한 책을 한두 권도 아니고 무더기로 전쟁 통에 가져갔다. 그러나 책은 기습군의 불화살을 맞고 화염 속으로 사라진다. 전쟁 가운데 힘없는 민초가 조총에 맞아 죽는 것도 모자라 먼저 굶어 죽는 등 희생의 중심이 되는 판에, 광해가 붙들던 책이란 당장 현실을 반영하지 못한 허상에 불과한 것이었다.

    광해의 암담한 여정을 그려나가는 영화는 그렇다고 비관주의에 빠지지 않는다. 극 중 인물들은 위기, 내부 분열, 다툼과 갈등 속에서도 어떻게든 한 발짝 나아가려고 한다. 대립군 수장 토우(이정재 역)는 대립의 일을 다 하고도, 광해가 맞닥뜨린 위기를 나 몰라라 하지 않고 "혹 우리 팔자에도 없는 성군이라도 나타날지"라며 말 방향을 돌린다. 왕과 그 권력에 대한 분노가 하늘을 찌르려 했던 그 시기에서 말이다.

    영화 <대립군>이 그린 단합이 중요한 이유

    사실 영화에서 위기를 바로 앞에 두고 모두가 힘을 합친다는 이야기는 익숙하다. 이 때문에 <대립군>을 볼 때 다소 진부하다고 받아들일 수 있다. 그럼에도 그 이야기가 담고 있는 함의는 가볍지 않다.

    주지하다시피 역사는 반복된다. 임진왜란, 훗날의 국권침탈까지 뭉쳐진 덩어리의 역사가 이를 증명하지만, 일상의 역사도 그러하다. 차별을 보는 그 잠깐, 그것이 나에게 편린에 지나지 않는 것이라 할지라도 분명한 건 곁에서 차별이 반복되고 있다. <대립군>에서 그린 단합은 이러한 차별을 무너뜨린다. 그러므로 비슷한 구조와 이야기로 구성된 영화가 반복된들 마땅히 용인할 수 있는 것이 아닐까.

    한 교육부 공무원의 '개돼지' 발언이 아직 선명하다. 어디 공직자뿐이겠는가. 차별 기제가 작동하는 건 순식간이다. 이미 국민 공통으로 학교란 체계 안에서 남과의 비교를 통한 성적 우위를 겪으며 앞으로 나아가야만 했다. 차별을 의식에 이식하고 몸소 체득하는 순간이었다. 그렇기에 무의식의 차별을 상쇄하려면 자신을 수련할 수밖에 없다.

    지금도 차별을 조장하는 이들에게, 그리고 차별의 허망한 당위에 무심결로 빨려 들어가려는 내 의식에게 영화 <곡성>의 한 구절로 되물으려고 한다.

    "중한 게 뭐인디? 뭣이 중헌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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