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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할 때도 낯설게 다가와 더 비극적인 <꿈의 제인>영화 2017. 7. 25. 01:25
[리뷰] <꿈의 제인>이 바라보다, 가출 청소년과 트렌스젠더를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32450
[오마이뉴스 글:고동완, 편집:유지영]
* 이 글에는 영화의 스포일러가 포함되어 있습니다.
어릴 때 영화는 그저 재미를 충족해주는 도구였다. 읽을 것도, 배울 것도, 봐야 할 것도 많은데 지루한 걸 굳이 찾아볼 필요는 없지 않은가. 그러다보니 혼을 쏙 빼놓는 액션이나 스릴러 장르를 보곤 했다. 재미가 없다고 하면 쳐다보지도 않았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서 영화를 대하는 인식이 차츰 바뀌었다. 재미를 추구하는 게 영화의 본령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을. 영화는 나와 우리의 거울이, 드러나지 않았던 어두운 곳의 조명이 되어준다는 것을 알게 됐다.
이것을 군에서 마냥 책만 볼 순 없어 무작위로 영화를 접하다 깨달았다. 영화엔 인물이 나오고 대개 그 인물을 천착한다. 인물이 누구더라도 삶의 궤적을 살피면 이야깃거리는 나오는 법. 그 부분만을 떼어다가 주제로 특화하면 영화의 이야기가 된다. 그러기에 실화가 영화로 많이 만들어지는 게 아닐까. 그래서 이런 생각을 했다. 영화는 허구가 아니구나. 내가 모르고 지내던 사람의 상황, 단면을 비추는 거울일수도 있겠구나.
영화 <꿈의 제인>은 소현(이민지 분)을 따라 전개한다. 소현은 가출 청소년이다. 학교는 보이질 않는다. 가출한 이들의 쉼터도 잠깐 비춰질 뿐이다. 구원의 손길이 흐릿하게만 보인다. 어디에 의탁해 살아가야 할지 하루하루 고민하는 모습이 반복된다. 함께 살던 오빠 정호(이학주 분)는 사라졌다. 남은 건, 모텔방. 그나마도 언젠가 떠날 수밖에 없는 곳이다. 거기서 뜻밖의 손길을 잡는다. 제인(구교환 분)이다. 그는 트랜스젠더다.▲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제인은 소현에게 "태어날 때부터 불행이 시작돼서 그 불행이 한 번도 안 끊기고 계속 쭈욱 이어지는 기분? 근데 행복은 아주 가끔 요만큼 드문드문, 있을까 말까"라고 되묻는다. 제인의 삶도 고립으로 점철된 것만 같은 인상을 주는 대사다. 제인은 가출 청소년들의 '엄마'가 되어준다. 가출 청소년과, 트렌스 젠더. 이 둘은 '소외'라는 하나의 공통분모로 묶인다.
'소외'라는 고리의 한계
소현은 제인 덕분에 잠시나마 고립되지 않고 함께하는 시간을 보낸다. '소외'의 고리가 연결되면서 '함께'가 되고, 희망이 생긴 것이다. 그러나 한계는 명확하다. 허약한 '그들'의 공생에선 누군가 빠져버리면 다시 각자의 삶, 소외될 수 없는 처지에 내몰린다. 제인이 빈자리를 내자, 가출 '팸'은 산산조각 나고 다시 흩어지는 것처럼 말이다. 그래도 어디선가 같은 처지의 사람을 만나고 팸을 꾸려야 한다. 제인은 '그들끼리'만 뭉칠 수밖에 없는 현실을 짐작했는지 "자, 우리 죽지 말고 불행하게 오래오래 살아요. 불행한 얼굴로 여기, 뉴월드에서"라고 자조적으로 말한다.
영화 <죽여주는 여자>에선 65세 할머니와 트렌스젠더, 다리 한쪽이 없고 가난한 장애인이 한 울타리에서 공생한다. 다른 여지는 없었다. 여기서도 소외감을 맛본 이들이 뭉쳤다. 멸시 혹은 탐탁지 않은 시선에 내몰려 '그들'만 연대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 된 건 아니었을까. 그럼에도 우리가 그들과 함께 가지 못하고 있는 건, 먹고 살기 바빠서, 시간을 줄 여유가 없어서 등등 갖가지 나름의 이유를 댈 수 있을 것이다. 현실적이자 피해갈 수 없는 이유라 하더라도 가슴 한 구석이 먹먹할 수밖에 없다.
가출 청소년이 주인공인 영화 <서울역>에서도 '소외'의 고리는 쉽게 끊긴다. 혜선(심은경 역)은 남자친구 기웅(이준 역)에게서 성매매를 하라고 강압을 받는다. 숙식하는 모텔비는 밀려있고 어디 하소연할 데도 없을 때, 기웅은 혜선을 닦달하고 혜선은 절망한다. 그들만의 연대는 먹고 살아야 한다는 현실 앞에 쉽게 뒤틀리고 만 것이다. 이들 영화는 결국 힘들더라도, 조금씩이라도 밑바닥이 함께하면서 우리가 같이 걸어야 한다는 것을 암시한다.▲ 스틸컷 ⓒ (주)엣나인필름
빛이 아무리 비춰도 생경함에서 오는 비극
<서울역>의 주무대는 밤이었다. 빛은 벽으로 격리된 방에서 나오거나 사람과 차가 다니는 도로의 형광등이다. 혜선에게 빛은 허울일 뿐이고 다시 어두운 곳으로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꿈의 제인>은 낮과 밤을 가리질 않는다. 환한 빛과 어둠이 영화 속을 오간다. 야간에서의 보도, 인적이 없는 야산, 몽환적인 분위기의 클럽, 비좁은 공간에 뒤얽혀 사는 공간을 비춘다.
영화는 시종일관 소현의 시선을 따라가면서 공간이 드러나지만 그 시선에 비춰진 공간은 우리가 외면했거나 혹은 간과했거나, 몰랐던 것들이다. 대낮, 그늘 말고는 어두운 걸 찾기 어려운 그 순간에도 소현의 시선이 생경하게 다가왔다는 것은 무관심에 경종을 울리는 가운데 더 비극적이다. 대낮에 소현이 돌아갈 곳이 <서울역>의 밤무대와 다를 바 없다는 것도 비극을 가중시킨다. 빛이 아무리 강하게 비춘들 혈혈단신인 상황, 우리는 그것을 환히 볼 수 있어도 넘어갔다.
<꿈의 제인>은 제목 그대로 꿈과, 제인이 분명 자리했던 현실이 혼재된 것만 같다. 감독이 전반부와 후반부를 대립시켰다고 하지만 대립은 그저 연필로 그려놓은 금에 불과할 뿐이다. 소현이 잠시나마 행복했던 그 순간, 모든 것은 아닐지라도 그 순간의 일부는 꿈이었을지도 모른다. 냉혹하고, 암담하고 슬픔만 다가오는 상황, 그것이 꿈이 아닌 현실이었을 것이다.'영화' 카테고리의 다른 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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