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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기 안 먹을 것도 아니면서 <옥자> 보고 왜 안타까워 하냐고요? (7.1)
    생각/영화 2017. 9. 16. 18:54

    [리뷰] 결과만을 추종하는 세태에 일침을 놓는 영화 <옥자>

    [오마이뉴스 글:고동완, 편집:유지영]


    http://star.ohmynews.com/NWS_Web/OhmyStar/at_pg.aspx?CNTN_CD=A0002338681

    영화 <옥자>가 지난 29일 베일을 벗었다. 봉준호 감독 특유의 해학적 묘사가 영화에 녹여있지만, 그 해학에도 날카로움이 심연을 파고드는 느낌을 가져온다. 그만큼 문제의식을 투철하게 드러낸 영화다. 

    영화는 익숙한 산골 풍경에서 시작한다. 산 깊숙한 곳에 할아버지(변희봉 분)와 손녀 미자(안서현 분)가 오순도순 살고 있다. 이들은 날마다 자족하며 지내고, 또 그러길 바란다. 할아버지와 손녀 곁엔 '슈퍼 돼지' 옥자가 있다. 적막한 산골, 손녀의 둘도 없는 친구이자 가족이다. '슈퍼 돼지'를 개발한 회사 '미란도'는 미자가 잠시 딴 곳에 가 있는 사이, 성장 상태가 좋은 옥자를 미국으로 데려가 버린다. 물론 거기엔 회사의 숨겨진 속셈이 담겨있다.  

    미자는 옥자를 찾으러 떠나면서 이역만리도 주저하지 않는다. 미자의 여정이 길어질수록 잠복해있던 치부와 생각할 거리가 스크린 밖으로 마구 던져진다. 미자가 찾는 옥자는 식용으로 개발됐다. 자칫 도축이 되어버리면 고기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존재다. 고기가 되면 옥자의 정신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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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옥자>의 한 장면
    ⓒ 넷플릭스


    결과만을 재단하는 세태에 일침을 놓다

    우리가 고기를 먹는 과정은 어떠한가. 고기를 굽거나 삶아 입에 집어넣는다. 고기를 씹으며 질김과 부드러움의 여부를 판단하고, 맛에 심취한다. 꿀꺽하고 다 먹으면 젓가락을 내려놓을 뿐이다. 식탁에 고기가 오르는 과정은 뇌리에 잘 없다. 동네 애완용 개를 아무렇지 않게 잡아다 식탁 위에 올라도 '보신탕'이란 이름, 그 결과가 가지고 우리를 반기는 세상이다. 

    옥자 역시 미국으로 건너와 실험실로 끌려온 뒤 말 못 할 실험에 동원되지만 이 실태를 모르는 소비자는 '슈퍼 돼지 소시지'를 먹으며 맛만 따질 뿐이다. 고기는 상징에 불과한 것일지 모른다. 우리 입에 들어가는 그 모든 것들의 실체를 속속들이 알 길이 없다. 눈앞에 결과만을 바라보고 재단하는 세태는 광범위하게 뿌리 내려져 있다. 봉 감독이 겨낭한 지점이 바로 이 부분이 아닐까.

    기업이 분기마다 실적을 발표할 때면 주가가 이에 맞춰 출렁이고, 이윤이라는 수치에 매몰되어 다른 것들은 우선순위에서 밀려나는 현실은 어떠한가. 공개와 논의, 숙고의 과정을 거치지 않고 결과만 좋으면 그만이라는 판단 아래 행해진 것들은 얼마나 많단 말인가. 영화는 결과만 좋으면 뭐든지 좋다는 효율만 좇는 세태에 일침을 날린다고 볼 수 있을 것이다.

    영화는 눈앞에 존재하는 이미지의 환상에도 일갈하는 모습을 보인다. 이미지도 결국 과정이 생략된 결과에 불과하다. 미란도는 페이스북과 인스타그램 등을 동원, 여론전을 펼치려 한다. 여기에 담긴 의도는 숨겨진 채, 대중은 만들어진 여론을 생각과 시각으로 소비하고 이는 다시 파생된다. 자본주의에서 일어나는 웬만한 소비 현상들이, 과정은 황폐해졌어도 그 결과만을 추종하고 있는 건 아닌지 영화는 되묻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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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옥자>의 한 장면
    ⓒ 넷플릭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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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옥자>의 한 장면
    ⓒ 넷플릭스


    냉소와 비관을 경계하는 영화

    영화는 간급을 조절하며 해학을 선사해주기도 하고, 때론 통쾌함도 주려 하지만 유쾌함은 생겨나지 않는다. 옥자를 트럭에 싣고 가던 미란도 직원이 '4대 보험을 들지 않았다'고 대답하는 대사는 쓴웃음을 낳는다. 글로벌 기업 미란도는 한국 지사의 경우 최첨단 사무실을 보유하고 미국 본사는 도시 전경이 훤히 내려다보이는 사옥을 가졌다. 이와 이 직원의 처지가 극명하게 대비된 데다 우리네 현실을 반영한 탓일 것이다.

    고기 맛에 심취해있던 나머지, 그 이면을 도외시하진 않았는지도 유쾌함을 막는다. 이 씁쓸함을 가시려면 도축되는 동물들의 면면을 들여다봐야 할 텐데, 그동안의 습관과 게으름이 합쳐져 그 의지가 쉽사리 좌절되기 마련이다. 이에 누군가는 '어차피 고기를 먹을 수밖에 없는데 뭐 그리 신경을 쓰느냐'는 냉소주의를, 또 다른 누군가는 '복잡다단한 세상, 매사 모든 걸 파악할 수 있겠는가'라고 자조할 수 있을 것이다.

    허나 옥자가 짚는 문제는 고기에 국한된 게 아니다. 일상적이고 보편적인 고기를 들여다봄으로써 각종 만연한 세태를 들여다보는 것이다. 옥자의 문제는 결국 어느 특정의 문제가 아니라 보편의 문제, 전인류적 문제로도 확장된다. 그리하여 영화는 '고기를 끊을 의지도 없는데 씁쓸함을 논하는 거냐, 어찌 일일이 살피냐' 같은 지적의 설득력을 힘껏 낮춰버린다. 

    설사 이 같은 일말의 냉소가 존재하더라도 신경을 곤두설 필요는 없을 것이다. 이면에 눈을 뜨고 관심을 기울이는 것만으로도 진일보한 모습이 아닌가. 시도조차 막아버리는 냉소를 뒤로하고 작은 시도가 켜켜이 모여 우리의 삶, 사회에도 좋은 영향을 미치는 것이 아니겠는가. 영화의 주제가 종식하기 어려운 육식인 건, 냉소와 비관으론 삶과 사회를 추동하는 데 별 소용이 없다는 점을 우회해서 드러낸 것인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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