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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통의 책임, 누구에게 있는가?생각/미디어 2012. 11. 20. 08:30
고동완(kdw1412@nate.com)
소통은 이 사회의 중요 화두다. 개인, 친족, 집단의 불통은 갈등의 비극을 낳았고 그 비극은 소통의 염원으로 이 사회에 발현하게 된 것이다. 그 발현이 모여 화두가 될 정도면 가정, 학교는 물론이거니와 정치, 사회를 막론한 각계 분야의 불통이 얼마나 산재하고 있는지 미루어 짐작하게 한다. 그렇다면 불통의 근본적 원인은 무엇인가? 그리고 불통의 책임은 궁극적으로 누구에게 있는가? 필자는 책임 규명에 주안을 두고자한다. 책임 주체의 확인은 원인을 확인시켜주며 해결의 실마리를 던져주기 때문이다. 다시 말해 책임을 물어 질책하고자 규명하는 것이 아닌, 원인을 파악하고 해결하는데 그 목적이 있는 것이다.
불통은 다양한 형태로 이 사회에 존재한다. 당장 삶을 지탱하는 가정에서 불통이 산재하다. 이전부터 불거진 청소년 가출, 가정 폭력 등 일련의 현상 등은 사회의 뿌리격인 가정이 불통에 시달리고 있다는 것을 뒷받침한다. 가정에서 벗어나 일생의 기초를 닦는 학교 현장은 어떠한가. 이 역시 불통이 만연하다. 끊이지 않는 학교폭력과 학생의 자살, 학우 또는 교사와의 갈등으로 불거진 사회 문제들까지. 심각한 것은 이렇게 사회 암적 형태로 자리잡고 있는 불통이 원활한 소통으로 전환되고 있지 않다는 데 있다. 이것은 70년대, 80년대, 90년대의 기록들을 더듬어봐도 지금의 불통 현실은 정도의 차이일 뿐 나아질 기미가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렇다면 왜 불통은 사회 전반에 걸쳐 기생하는 정도가 줄어들지 않고 있으며 불통의 최후의 책임은 누구란 말인가. 필자는 이러한 불통의 궁극적 책임을 교육에 있다고 보고 있다. 이는 진부한 이야기 일 수 있겠지만 소통의 갈망 정도가 결코 줄어들지 않는 이 사회에서 그 책임 규명의 최종적 결과물은 분명 교육임을 부인할 수 없다.
우리는 기억을 되뇌어 볼 필요가 있다. 우리가 삶의 기틀을 다질 교육의 과정에서 소통을 의식했던 적이 있었던가. 지금 그나마 순수해야 할 초등학교 회장 선거 마저 소통의 자세 보다는 금권으로 유혹하는 듯한 공약으로 표심을 얻어내는 선거로 전락한 마당에, 그리고 학급 토론 역시 형식적으로 변질된 마당에, 소통을 진정 배울 기회가 있었는지 의문이다. 우리 교육이 소통의 소중함 보다는 또 다른 목적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는가 하는 한탄의 의문이 생긴다.
2010.2.23 동아일보 '반장-회장 한번 안하고 국제중-특목고 갈수 있겠니?' 중
「예비 초등 5, 6학년 두 딸을 둔 주부 조모 씨(38·서울 양천구 목동)는 “요즘 아이들은 예전처럼 공부 잘하고 모범적인 아이가 아닌, 엄마들이 간식을 많이 ‘쏘는’ 아이를 반장으로 뽑는다. 6학년이 되는 첫째딸을 이번에 반장으로 만들기 위해 5학년 때부터 햄버거, 떡 같은 간식을 여러 번 샀다”고 전하면서 “엄마들은 정신적 경제적으로 힘들더라도 아이가 반장, 회장이 되면 여러모로 아이에게 도움이 되는 경력으로 남을 것”이라고 말했다.」
우리는 소통을 진정 학습할 기회 없이, 매체만을 접하며 기성의 토론, 정치 문화를 진정한 소통인냥 무의식적으로 받아들이진 않았는가? 그러한 과정에서 싸움이 만연한 영역에 냉소적 시각을 주면서 그 싸움을 소통의 나름 형식으로 받아들이고 삶에서 실천하지는 않았던가? 교육에서의 소통 학습의 부재는 대중과 매체의 의존한, 소통의 그릇된 학습을 불러왔다는 게 내 생각이다.
학교에서는 민주주의 역량, 소통의 힘을 학생에게 교육시키는 것이 일차적 목적이 되어야한다. 그 일차적 목적이 후순위로 밀려나게 되면 소통의 부재라는 심각한 문제는 영영 해결되지 않는다. 더욱 문제인 것은 위정자들이 소통 부재의 근본적 원인을 찾지 못하고 있다는 것이다. 소통 부재의 해결 방안을 국민의 의식 개혁 쯤으로 치부해버리는 근시안적 태도를 보인다. 교육부터가 소통의 터를 장려하지 않는 이 마당에 의식의 변화 정도의 잣대로 해결하려 드는 것은 또 다른 상처만 낼 뿐이다.
소통 부재의 책임을 교육으로 지목했다해서 소통의 중요성을 교과 학습에 포함시켜 학생들에게 시험을 보게 하고, 교육시키자는 것이 절대 아니다. 학교는 학생에게 소통의 환경을 마련해주고 소통을 위한 프로그램을 마련해야한다. 즉 계몽의 장을 만들어주는 것이다. 그 토대 위에 학생들은 다양한 소통을 하게 되면서 소통 능력을 기르게 되고 바로 이것이 불통의 비극을 끊어버리는 첫 단초가 되는 것이다. 이제 불통의 대를 끊어버리기 위해서라도 소통의 환경을 전 학교에 구축시키는 것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 그것이 먼 후세가 겪게 될 수 있는 불통의 비극을 미연에 치유하는 효과로 작용할 것임이 분명하기 때문이다.
거시적으로 봤을 때 기성 세대 내외부의 불통 역시, 과거 교육의 산물이라는 게 내 생각이다. 어찌보면 세대 간 불통도 과거와 현재, 교육의 행태로 빚어진 결과라고 본다. 그런데 책임을 교육으로 지목하고도 불통의 해결이 녹록하지 않다. 커다란 이유는 지금의 교육으로는 학교가 소통의 장을 마련할 동기를 제대로 부여할 수 없기 때문이다. 무언가 커다란 실뭉치가 뒤엉켜 해결의 실마리를 잡고도 풀기가 애매모호한 그런 상황이다. 그래서 더욱 답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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