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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훈련병은 '메르스' 상황 알아선 안 된다?
    쓴 기사/기고 2017. 10. 15. 20:45

    [24개월 병영 기록 ⑦] 메르스가 휘몰아치던 그 때, '훈련소 안'은 이랬다

    [오마이뉴스 글:고동완, 편집:김도균]

    [이전 기사: 훈련병은 왜 기를 쓰고 훈련을 받으려 했을까]

    2015년 메르스(MERS)가 전국을 휩쓸던 무렵, 훈련병들도 공포에 밤을 지새웠다. 사실, 그 공포라는 건 감염의 우려 때문이라기보단, 훈련을 마치면 제공되는 휴가가 날아갈지도 모른다는 불안감이었다. 6월이 되자 훈련소엔 메르스 때문에 '특별 휴가'가 취소된다는 소문이 횡행했다. 공군은 원래 6주의 훈련을 마치면 2박 3일의 휴가가 주어졌다.

    당시 메르스는 외부인의 부대 출입을 일체 통제할 정도로 그 위력이 강했다. 신문이 있나, 뉴스가 있나, 인터넷이 있나. 바깥세상을 모르는 훈련병들은 교회에서 잠시 알려주던 '인터넷 이슈'로 상황의 심각성을 짐짓 알았을 뿐이다. 인파로 붐비던 롯데월드가 한산한 사진이 교회 스크린에 뜨자, 훈련병들은 놀라워했다. 

    6월 5일 전후로, 전 훈련병은 마스크를 착용하란 지시가 떨어졌다. 메르스가 수그러들기는커녕 더 심각해져 간다는 걸 직감할 수 있었다. 그러나 훈련병은 어느 누구도 바깥에서 누가 사망하고, 전염됐는지 알 도리가 없었다. 메르스 치사율이 50%라는 얘기가 돈 게 바로 이 무렵이다.

    ▲  훈련병들이 점호장으로 뛰어가는 모습.
    ⓒ 공군 공감


    교회 스크린과 식당에 나부끼던 문서로 상황 대략 알아

    메르스의 정확한 진행 상황은 훈련병들에게 고지되지 않았다. 훈련병들이 '식당 봉사'로 식판에 밥을 퍼주고, 잔반을 처리하다 잠깐의 여유가 있을 때 식당 사무실에 나부끼던 '감염자 병원 현황' 정도만 잠시 볼 수 있었다. 그것도 간부가 보지 말라며 막아 세웠다. 

    때가 어느 때인데, 정보를 통제하는지 알다가도 모를 일이었다. 이후에도 메르스 사태가 어떻게 진행되는지는 모두 비공식으로 전해 들었다. 교관은 메르스에 대해 말하기를 꺼리거나 함구했고, 추측만 무성할 뿐이었다. 그렇다고 교관에게 "말해달라" 요구하기도 어려운 노릇. 메르스 상황을 알면 훈련에 임할 군인 정신이 떨어지기라도 하는 것인가. 온 나라가 시끄러울 때 오직 훈련병만 그 상황을 모르고 지낸다는 건 선뜻 이해가 되질 않았다.

    마스크를 착용한 다음 날, 한 실내 수업에서 교관이 일부 기지에선 휴가 제한을 염두에 두고 있다는 얘기를 했다. 훈련병에겐 청천벽력 같은 소리였다. 몇몇 비행장에선 감염자가 있다는 소문도 덧붙였다. 메르스는 진정될 기미가 보이지 않은 것 같았다. 6월 중순이 넘어가고 입대 34일 차인 20일. 결국, 휴가가 '기약 없이' 연기됐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훈련병들 얼굴에 화색은 사라진 지 오래였다. 훈련병에겐 휴가가 그렇게 각별할 수가 없다. 바깥에 있으면 6주가 금방 지나갈 것 같지만, 훈련소는 그렇지가 않다. 그 2박 3일의 휴가를 바라보고 고된 훈련을 견뎌오지 않았나. 

    ▲  2015년 6월 7일, 메르스 사태 당시 담화에 나선 최경환 국무총리 권한대행.
    ⓒ YTN 갈무리


    휴가를 두고 일어난 '희망 고문'

    훈련병에게 더 고통스러웠던 지점은 휴가를 못 가는 대신, 이틀을 더 훈련소에 지내게 된 데 있었다. 탄식이 안 나올 수 없는 것이다. 보통 수료를 하고 휴가를 다녀온 뒤, 특기학교로 가면 정해진 시간에 TV와 구비한 책을 마음대로 볼 수 있다. 허나 훈련소에선 책 한 권도 마음대로 읽을 수 없었다.

    이 와중에 훈련병으로선 중요한 날이 다가왔다. 특기 배정의 날이다. 22일은 특기를 부여하는데 앞서, 각 특기 TO가 어느 정도 되는지 공개되는 날이었다. 급양 TO는 없었고 헌병 TO는 50명 남짓이었다. 어느 특기를 지망할지 눈치작전이 이어졌다. 

    29일, 특기 배정의 시간. 전산으로 특기를 돌렸다. 공군의 3대 기피 특기가 '헌병, 방공포, 급양'이다. 헌병이 걸린 이가 스크린에 뜨면 위로와 탄식이 나왔다. 원하는 특기에 걸리면 환호성이 나왔다. 살펴보니 대개 학교 전공에 따라 특기가 갈렸다.

    훈련병들은 다시 실낱같은 희망을 품었다. 유격, 행군, 총검술, 각종 훈련을 견디며 마음 한편에 휴가가 임박할 것이란 희망을 가지고 여기까지 오지 않았나. 희망을 쉽게 버릴 순 없다. 6월 24일, 입대 38일 차 때서도 휴가가 정말 물 건너간 건지, 소생할 가능성은 없는지 각종 루머가 떠돌았다. 훈련병들의 휴가에 대한 염원이 고토록 간절했다는 방증이었다. 루머는 육군 병사는 휴가 나갔으니 우리도 나갈 수 있을 거라는 등, 확인이 불분명한 것들이었다.

    그 날, 취침에 들 때 중대장이 스티커로 말을 이어가길 시작했다. 훈련병들의 귀는 쫑긋 곤두서있었다. 중대장은 '중대발표'를 했다. "훈련병인 만큼, 휴가가 나갈 수 있도록 검토가 이뤄질 것"이라고 말한 것이다. 환호 소리가 침상 여기저기서 터져 나왔다. 

    결국 '우리끼리'의 수료식

    그러나 다음날, 하루도 못 가서 어제 중대장의 얘기는 '희망 고문'에 지나지 않게 됐다. 결국, 수료 외박이 취소됐다는 비극적(?) 소식이 전달된 것이다. 말년 병장이던 조교가 내무실로 들어오더니 훈련병이 수료 외박이 취소된 건 정말 이례적이라며 위로를 건넸다.

    26일, 수료 날. 날씨는 흐릿했다. 메르스 때문에 기지가 출입이 통제된 탓에 수료식엔 부모나 친지, 가족 아무도 안 왔다. 보급받고 한 번도 입지 않은 신형 전투복을 입고, 훈련병 명찰을 뗐다. 이제 이병 표시를 단 것이다. 수료하던 그 당시엔, 이병이 그렇게도 대단해 보였다. 훈련단에서 직함도 훈련병에서 교육병으로 바뀌었다. 그러나 이제 군 복무의 출발 선상에 선 것에 불과했다.

    수료는 했지만, 훈련병이 갈 곳은 다시 훈련소였다. 다음날, 메르스가 아니었다면 집에서 안락할 시간을 보낼 그 시간, 훈련소에서 '위로(?)' 행사를 열었다. 체육 대회가 열린 것이다. 피구와 줄다리기를 하다가 오후엔 '킬링타임용'으로 1996년 영화 <더 록>을 보여줬다. TV에서 몇 번을 봤는지 모를 영화였다.

    이제 특기 학교로 이동할 채비를 해야 했다. 훈련소 얘기는 마무리 단계에 접어들었지만, 그 전에 짚지 않은 중요한 문제점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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