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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남한산성>이 택한 정공법, 관객의 마음 무너뜨렸다
    생각/영화 2017. 11. 15. 16:51

    [리뷰] 원작 김훈의 소설로 화제를 모았던 영화 <남한산성>의 매력

    [오마이뉴스 글:고동완, 편집:곽우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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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J엔터테인먼트


    백설과도 같은 새하얀 눈밭이 오색을 압도한다. 들숨의 공기는 칼바람의 한기이고, 날숨은 차가운 세파 아래 김이 되어 사라진다. 응당 생을 부지하려면 숨을 쉬어야 하나, 그러는 것도 고통이다. 고통을 몰아온 추위를 막을 재간도, 힘도 1636년 조선의 겨울엔 없었다. 그러나 선택은 해야 했다. 그 선택은 삶과 죽음, 명예와 자존이 뒤섞인, 생사와 치욕의 갈림길에서 이뤄질 것이었다.

    인조 14년, 병자호란을 그린 영화 <남한산성>은 이 갈림길에서 선택을 감행해야 했던 고빗길의 여정이었다. 김훈의 소설을 원작으로 한 영화는 청과 조선 간이 아니라 산성 안에서 언어와 언어가 대치하고, 신념과 신념이 부딪히며, 저편과 이편이 공박하며 선택을 번민해야 했던 조선의 비운을 사실감 있게 담았다.

    충돌과 긴장의 두 축은 화친과 척화다. 최명길(이병헌 분)은 생사에서 생을 중시하고, 김상헌(김윤석 분)은 청나라에 엎드리는 치욕 대신 죽음을 각오하더라도 명예를 택한다. 이 둘이 청나라 대군을 앞두고 성에서 맞붙는 건 우연이 아닌 필연이었다. 그런데 둘의 입에서 나온 말은 앞날에 의심이 여물었던 그 겨울에 옳고 그름을 단정하기란 어려운 것이었다.

    현실론과 명분이 맞부딪힌 말의 향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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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J엔터테인먼트



    대군을 끌고 온 청나라에 신의만을 믿고 선뜻 화친을 청하기도 미심쩍었고, 대군을 두고 필전을 벌이겠다는 발상도 뒤탈이 안 날 수 없었다. 인조(박해일 분) 앞에서 머리를 조아린 신하들은 종묘사직을 걱정하며 화친과 척화를 저울질하지만, 민초들 목숨이 풍전등화의 지경에 이른 상황에 민초의 생사와 종묘사직은 별개로 여길 게 아니었다.

    남한산성의 조선 병사는 모두 만 4천. 수적으로 어림잡아 10배 되는 청나라 군대에 비할 바 못 되고 만 4천의 병사마저 삭풍의 추위에 야위어만 갔다. 최명길은 청나라 요구에 부응하여 이들의 도탄을 구하려 했고, 김상헌은 '자존'의 명분을 다지며 병사의 추위를 도외시하지 않았다. 둘의 주장은 결이 달랐지만, 백성에 생각이 모이는 어느 한 지점은 크게 엇나가질 않았다.

    그러나 선택을 해야 했다. 외교는 현실론을 무턱대고 무시하기가 어려운 영역이기에 최명길은 눈앞의 현실을 앞세워 화친에 응하려 했고, 김상헌은 현실의 부박함과 치욕스러움을 결사항전으로 돌파해보려고 했다. 영화는 이 둘의 균형점을 이탈하지 않는다. 현실과 명분의 갈림길에서 나오는 말로 최선 혹은 '차선'을 낙점해야 하는 국가 대사의 운명을 치열하게 그려낸다.

    두 고관대작이 나눈 말의 향연은 현실에 무력했던 당대의 서글픔을 말로 토해낸 것임은 물론, 현실과 당위를 오가며 삶을 지탱해야 했던 우리와도 맥이 이어진다. 그러기에 그들이 나눈 논쟁은 저마다의 삶이 부딪히며 생긴 우리네 고민과 궤를 달리할 수 없다. 또 말만 내뱉는 병조판서와 달리, 말을 곧 실천으로 잇는 그들의 말에 힘이 있다는 점도 말과 실천이 따로 있어선 각기 성립하기 어렵다는 걸 증명한다.

    과장을 경계하고 긴장을 이어간 보기 드문 '사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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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CJ엔터테인먼트



    하지만 두 대신의 말로는 당시 조선이 내포한 문제를 대변할 수 없는 한계를 지닌다. 영화가 그 외의 인물에게도 초점을 맞추려는 이유일 것이다. 산성의 대장장이 서날쇠(고수 분)는 "청을 섬기든, 명을 섬기든 저와 상관없는 일"이라고 말한다. 날쇠는 조정에서 수없이 오고 가는 말에 백성의 실리와 안위가 정녕 있는 건지 반문하는 기색을 보인다. 날쇠의 의동생 칠복(이다윗 분)은 평소엔 귀천을 따지다가도 국난 앞에선 합일을 요구하는 조정의 모순을 타박한다.

    "난 아무 쪽도 아니요. 다만 무관이요"라고 말한 이시백(박희순 분)에게선 사욕을 위해 갈등과 편 가르기를 부추겼던 대신들 행태에 충직한 행동으로 일침을 놓는 기백이 엿보인다. 영화는 조정 밖 인물이 소임을 다하는 모습을 부각함으로써 지배층을 필두로 한 당대의 모순을 드러낸다.

    마주 앉아서 입씨름만 할 것 같은 최명길과 김상헌이 존중의 예를 다하려는 모습은 영화가 그려낸 미덕이다. 청나라의 진격을 앞두고 최명길은 인조 앞에서 벌인 김상헌과의 논쟁에서 "(김상헌은) 지극히 의로우나 삶을 가볍게 여긴다"고 말한다. 본인의 강고한 신념은 굽히지 않되 타인의 신념을 추어올리는 일을 마다하지 않은 것이다.

    영화의 서사는 원작의 연대순대로 전개돼 '뻔함'이 예상되지만 배우들의 호연과 말의 양상을 지켜보고 있자면 신경이 곤두선다. 고통 받는 건 으레 민초라는 살짝 진부한 면모가 엿보이나 근래 보기 어려웠던 백병전과 공성전 등의 사실적 묘사는 그 진부함을 덜고 처절함의 울림을 낳는다. 과장을 경계하면서 승리가 아닌 패배의 역사를 역력히 드러낸 것만으로도 자긍심 고취에 중점을 뒀던 한국 사극에서 보기 드문 선례일 것이다. 

    예컨대 고구려 열풍이 불던 2006년을 전후로 당나라 대군을 물리친 전투를 조명한다든가, <정도전> <육룡이 나르샤>에서 조선 개국에 밑돌이 됐던 위화도 회군을 그려낸다든지, 임진왜란의 해전을 영화 <명량>을 비롯해 여러 작품에서 다뤄온 걸 보면 한국 사극이 향한 지점은 '승리'라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이 같은 도식을 깬 <남한산성>은 명확한 결말을 내어 생각의 일변도를 강요하는 대신, 담담한 마무리로 그 폭을 넓히려 했다는 점에서도 근래 드문 사극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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