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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중의 공격성과 방어성
    미디어/담론 2013. 4. 2. 06:00

     어느 누가 대중의 공격을 감당해낼 수 있겠는가? 다시 바꿔 말하자면 어느 누가 대중을 향해 공격을 하겠는가? 대중과 부대끼며 살아가는 사회 구성원인 이상, 대중의 집단 포화에 견뎌낼 사람은 이 세상 천지에 몇 없을 것이다. 그런데 대중은 현명한가? 모든 걸 현명하다 말하는 건 사실상 거짓이다. 개인도 우둔한 행동을 하기 마련인데, 개인을 넘어 집단들이 합쳐진 대중은 현명함의 실현을 별 탈 없이 추구해나갈 것인가?

     

     개인도 누군가의 공격에 방어에 나서는 것이 이치다. 대중도 마찬가지다. 대중을 향한 공격은 곧 대중의 집단 방어로 이어진다. 대중은 집단 지성의 착각 속에 배타성을 띠기 일쑤다. 대중에 속한, 그 대중에 의한 주장들만이 우월하고 옳다는 주의다. 그 대중의 군집들에 선뜻 포화를 낼 수 없는 것도 무지막지한 방어성에 기인한 측면이 크다.

     

     대중의 공격성이 비대화 될 경우 몇몇 문제점이 뒤따르게 된다. 첫째, 소수 담론이 제 기능을 못하게 된다. 대중이 주창하는 담론들에 함몰될 수 있는 것이다. 대중이 소수 담론을 받아들일 가능성은 거의 전무하다. 옳은 것은 옳게 받아들일 수 있겠지만 일단 대중 자체의 군집이 형성된 이상, 새 담론이 투입되기엔 시간과 노력이 필요할 수 밖에 없다.

     

     둘째, 대중의 독선과 아집을 방조하는 결과를 낳는다. 독선과 아집이야말로 사회 암적이다. 그런데 공격성이 커진다면 누가 나서서 독선과 아집을 맹렬히 폭격할 개인 혹은 집단이 용감히 나설리 만무하다. 나선다는 것 자체는 협박, 테러를 견뎌내거나 자신의 생활 필수 요소 등을 집어던질 각오를 해야 한다는 걸 의미한다. 독선과 아집의 질주는 브레이크 없는 열차가 종착지를 앞두고서도 멈출줄 모르는 기세로 달리는 것과 마찬가지다. 철로의 끝은 어딜가나 있으므로 사고로 귀결됨은 물론이다.

     

     셋째, 대중의 아첨화가 발생한다. 대중의 공격성은 첫째로 방어적 측면, 둘째로 선제공격의 측면으로 나눠진다. 아첨은 말 그대로 다짜고짜 공격을 주창하는 것이다. 대중의 그릇된 주장을 용기있게 성토하는 것이 아니라 대중의 인기에 영합하여 한 몫 얻어내기 위해 아첨을 떨며 공격의 선봉자를 자처하게 되는 것이다. 뒤엔 대중이 버팀목처럼 서있으니 해를 당할 가능성도 그만큼 적으므로 누군가는 선뜻 나설 것이다.

     

     넷째, 극단주의자가 발생한다. 대중의 포화를 겉에서 봤을 땐 일반적 공격의 행동 모습으로 보기 십상이지만 그 안에는 극단주의자가 포함되어 있다. 대중의 공격성에 편승하여 판을 뒤엎어버리자는 식이다. 극단주의자 자체를 신경 써서 분류하기란 여간 쉬운 것이 아니다. 극단주의자는 때론 한 개인과 집단을 파괴하는 행동도 서슴지 않는다. 극단주의자는 사회 전체를 조망하기 보다 대중을 우선시하며 대중이 곧 사회라는 등식을 성립하려 분투한다. 이 과정에서 커다란 비극이 발생되는 것이다.

     

     다원화된 사회에서 대중들이 일심동체가 되어 공격성과 방어성을 쥐락펴락하기는 쉽지 않다. 어느 한 무리, 대중들이 현존하면 반대급부로서 한 대중과 배척되는, 또 다른 대중이 한 사회 내부에 공존하게 되는 것이 지금의 세상이다. 그러나 양극단 대중들이 공격과 방어의 각개 전투를 시작한다면 이야기는 달라진다. 위 열거한 내용들이 곧이어 발생하리라 보기 때문이다.

     

     문제는 비단 극단 각개전투 뿐만 아니라 한 개인과 집단을 향한 일방적 전투에 있어서도 열거한 내용들이 발현된다는 것이다. 이는 사실상 집단적 가혹 행위라 봐도 무관치 않은데, 신문선 사태처럼 대중의 공격성의 지나친 표출이 어느 한 개인으로 이어질 수 있다는 걸 목도해왔으며 결과적으로 방어 기능이 제 작동을 하면서 공격과 방어의 순환 작용에 따라 옳고 그름의 논리가 교환되는 과정이 아닌, 일방적 폭력으로 변모한 것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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