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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잉마르 베리만의 영화 <산딸기> - 꿈과 이완, 모호함을 중심으로(4.26)
    생각/영화 2018. 9. 30. 14:08

      꿈은 과학적으로 증명하기 어려운 오묘한 것이다. 수면의 상태에서 환영에 따라 빚어지는 상황과 맥락들은 말로서는 설명하기 어려운 그 어떤 것이다. 두 가지는 분명하다. 현실에서의 인식이 꿈에 투영된다는 것이고, 시간의 축적에 따라 꿈의 내용이 변주된다는 점이다. 꿈과 현실은 괴리적인 동시에 분리되지 않은 무엇이다. 시간의 흐름은 현실을 인식하는 지평을 넓히고, 꿈의 소재를 키운다. 그것은 악몽이 될 수 있고, 예지몽일 수 있으며 길몽이 될 수 있다. 꿈은 우리가 마주하는 현실만큼이나 해석의 분분함을 낳으며 다층적이고, 세부적이다. 심상이 다른 주체들마다 꿈의 내용이 달라진다는 점에서 꿈은 인생을 반추하는 기회일 것이다. 잉마르 베리만의 <산딸기>는 78세 이삭 보리(빅토르 시외스트롬)가 꾸는 꿈의 복잡성이 현실과 교유하고, 교차하는 영화다.


      <산딸기>는 이삭의 내레이션으로 시작한다. 서재에는 그밖에 없다. 의사인 그는 자신의 완고한 성향을 드러내며 노년의 쓸쓸함을 밝힌다. 부인은 일찍이 사별했고, 역시 의사인 아들은 그와 같이 살지 않는다. 96세 나이에도 정정한 모친과는 떨어져 지낸다. 파이프를 입에 문 채 맞바로 성격과 가족 사항을 축약해서 전달하는 그는 서사의 길잡이이자 중심이다. 그에게 지금 온전히 남은 것은 50년 된 의사란 직업과 명예, 그리고 함께 사는 가정부다. 내레이션으로 구성된 개괄은 요약적이면서 군더더기가 없다. 중언부언하지 않는 베리만의 구성이 드러난다. 개괄을 마친 영화는 크레딧을 마치고, 본론으로 직행한다.


      잠결에든 이삭은 서사의 첫 꿈을 꾼다. 암흑의 침실과 대비되는 대로변은 환하지만 차와 행인은 보이지 않고, 시계는 분침이 없다. 황당함에 걷다가 우두커니 선 누군가를 돌려서 보니 얼굴의 형상은 이지러졌고, 이내 전신의 형체가 소멸된 채로 핏물이 바닥에 펼쳐진다. 달려가던 마차는 가로등과 부딪히더니 실은 관을 기어이 쏟는다. 뚜껑이 열린 관에는 본인이 있다. 불완전한 얼굴과 핏물, 관의 연속적인 배치는 부정적 의미에 쐐기를 박는다. 악몽에서 신음하다 깨보니 침실의 어둠은 사라지고, 해가 떴다. 꿈의 밝음과 현실의 밝음은 두려움으로부터 이어진다. 박사 학위 50주년을 기념하여 룬드로 떠나려던 이삭은 악몽을 죽음으로 인식한 듯, 비행기로 가려던 계획을 바꿔 차로 이동한다.


      <산딸기>에서 꿈은 분기점의 기능을 한다. 이삭은 첫 꿈을 운명론적 시각이 가미된 두려움으로 받아들였다. 그 꿈이 죽음을 피하기 어렵다는 계시인지는 당장 알 수 없다. 분명한 건 꿈에 따른 이삭의 행동 변화는 영화의 틀을 ‘로드무비’로 바꾸고, 아들의 며느리 마리안(잉그리드 서린)이 동행하는 계기가 됐다는 점이다. 차 안에서의 이삭과 마리안의 대화는 마리안이 이삭을 ‘냉혹한 이기주의자’라고 말함에 따라 개괄에서 언급된 ‘완고한 성향’을 매개한다. 그리고 이삭은 스무살 때까지 여름에 머물렀던 별장에 들르는데, ‘완고한 성향’과 ‘이기주의자’를 준거로 한 꿈같은 환영이 펼쳐진다.


      과거로 돌아가 첫사랑했던 여인, 사라(비비 앤더슨)가 산딸기를 줍고 있다. 이를 본 이삭이 반가움을 표하나 고정돼 있는 과거에 달라지는 것은 없다. 이삭의 동생 시그프릿이 사라 옆에 달라붙어 추근거리다 키스를 하지만, 이삭은 관음 하는 거 마냥 바라볼 뿐이다. 이삭은 집 내부로 들어가더니 결국 흐느끼는 사라를 바라본다. 사라는 “이삭은 너무 착해, 나 같은 게 어떻게”라며 자책한다. 그것은 키스를 물리치지 않았던 후회와 이삭에게 보내는 연민인 동시에, 자신은 이삭이 사랑할 대상이 아님을 우회적으로 드러낸 것이기도 하다. 시그프릿의 사랑은 도발적이었고, 이삭이 할 수 없는 무엇이었다. 이삭의 착함과 완고함, 완고함을 지키려는 데서 비롯되는 이기적 성향, 그리고 사라의 자책까지. 개괄의 ‘완고한 성향’에서 매개하는 대상과 의미는 점차 확장되고 있다. 환영을 현실로 대치한 듯, 과거의 경계를 자유로이 넘나드는 이삭은 본인의 성격에 대한 생각과 첫 꿈, 마리안의 말을 조합해나가면서 첫사랑이었던 사라의 과거까지 부른 셈이 됐다.


      과거는 꿈같은 환영을 통해 현실과 고리가 맺어진다. 환했던 꿈이 현실의 아침과 이어졌듯 말이다. 돌아온 현실엔 사라와 똑같이 생긴 사라가 있다. 이 사라는 이탈리아로 가겠다고 한다. 사라 곁엔 두 남자가 있다. 안데쉬와 빅또르. 두 남자는 사라를 두고 대척점에 선 것 같지 않지만 사라의 생각은 좀 다른 것 같다. 두 남자를 사랑의 대상으로 본다. 사랑이란 감정은 알딸딸한 향수를 일으킨다. 대개 첫사랑은 소멸되지 않고, 기억의 한 귀퉁이에 존재하는 것이다. 사라가 나타났으니 사랑에 대한 이삭의 추억은 강화될 것이다. 물감이 번져가듯이, 거두절미하고 들어간 개괄의 얘기들이 매개를 거듭하며 뻗어간다. 사라와 두 남자는 이삭, 마리안과 동승하여 ‘로드무비’에 편승한다. 


      차가 이동하는 길은 확장의 연속성을 더한다. 이동 중 상대방 차가 운전자의 실수로 전복한다. 차에서 중년 부부가 걸어 나오는데, 부인은 뜻밖에도 남편을 때리려다 팔이 꺾어져 사고가 났다고 말한다. 부인과 남편에게 있어서 화합은 없고, 험담과 신경전이 있을 뿐이다. 남편은 훌쩍이는 부인을 보더니 눈물이 진짜인지 가짜인지 구별을 할 수 없다는 핀잔을 늘어놓는다. 공감 의식의 결여다. 공감 없는 사랑은 불만과 시기를 제조한다. 이삭은 그런 말을 들으면서 애써 창밖 풍경을 바라본다. 부부의 등장은 공감과 관련한 질문을 던진다. 관계에서 생기는 문제의 근원은 무엇일까. 상호간의 불신은 어디에서 기인하는 걸까. 공감의 실종은 이러한 원인의 한 축을 담당한다. 베리만은 서로 대립하는 부부를 길에 등장시킴으로써 이삭에게 공감에 대한 의식을 환기하고, 사랑이 실패한 이유의 실마리를 엿보게끔 한다. ‘로드무비’란 틀을 통해 논의를 증폭시켜나가는 진행인 것이다.


      증폭의 과정은 일률적이지 않다. 이삭 일행은 어머니 집 방문을 앞두고 주유소에 들른다. 이삭이 처음 개업했던 곳이다. 이곳 주민들은 이삭을 두고 호평 일색이다. 주유소 남편은 아들 이름에 박사님 이름을 따자 할 정도로 이삭을 추어올린다. 이삭은 마을을 괜히 떠났다고 혼잣말을 하는데, 적적함에 다소 사무쳤던 감정이 올라온 말일 것이다. 베리만은 길에서 벌어졌던 일련의 부정적 상황에 이어 마을의 주유소에선 긍정적 상황을 도입했다. 완고함과 이기적이라는 것은 호평과 맥이 잘 통하지 않는다. 모순적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베리만은 ‘부정 일색’을 삼갔다. ‘부정의 늪’은 인간성을 파괴하는 배경이다. 이삭은 그 늪에 빠지지 않고, ‘부정’과 ‘긍정’을 느끼면서 회복의 원기를 얻는다. 서사에서 이삭에게 전달된 긍정적 신호는 사실상 이 무렵이 처음이다. 주유소가 등장하던 시점은 영화가 중반부에 다다르던 때다. 만일 주유소에서의 말이 아닌 ‘부정’을 이어갔다면 어땠을까. 아마 사랑에 대한 논의는 진전되지 못했을 것이다. 자존감의 하락은 자학으로 이어지고, 사랑에 대한 떠올림을 줄이는 결과를 낳는다. ‘부정’만을 강화시키는 게 능사가 아님을 베리만의 구성력에서 느낄 수 있는 것이다.


      그러나 서사의 주제인 꿈에 대한 논의는 결이 달라지지 않는다. 꿈의 개념을 확장시킨다. 식사를 마치고, 이삭은 어머니를 만난다. 오랜만에 만난 어머니는 마리안을 보더니 이삭의 며느리, 카린인줄 알고, “천하의 몹쓸 것”이라며 혐오한다. 그러더니 어린 사라가 녀석을 기르다시피 했다는 말을 덧붙이면서 시그브릿의 아들 얘기를 꺼낸다. 어머니는 아들에게 주고 싶다며 아버지가 남긴 금시계를 꺼내 보이는데, 이삭이 첫 꿈에서 봤던 초침 없는 시계와 흡사하다. 베리만이 구상한 꿈의 성격이 드러나는 부분이다. 얼핏 사물의 재출현을 두고 이삭의 첫 꿈을 예지몽이라 여길 수 있다. 그러나 엄밀하게 보면 예지는 아니다. 사물만 가지고는 예견을 할 수 없다. 이성을 바탕으로 맥락과 사실이 사물을 뒷받침하고, 미래에 그것이 현실화될 때만이 예지로 받아들일 수 있다. 초침 없는 시계는 도리어 회상을 일으켰고, 그게 삽입됐던 꿈은 결국 기억을 재생시키는 역할을 했다. 이는 사후의 일이고, 사전에 대처할 수 없는 것이었다.


      만일 이삭이 꾼 꿈이 예지의 기능을 하여 유사한 일이 현실로 일어났다 해도, 어디서 언제 일어날지는 인간이 알 수 없는 영역이다. 꿈의 일을 예지로 받아들이고, 그것을 염두에 두면서 삶을 살아가는 이가 몇이나 되겠는가. 설사 꿨던 꿈을 연거푸 상기하더라도 일상의 피란 가운데 그 꿈은 다른 꿈으로 대체된다. 꿈에서 불길한 징조가 나온다면 현실에서 인간이 과연 그걸 예단하고, 막을 수 있겠느냐는 의구심이 드는 대목이다. 이것은 인간으로서 무력감이 배어나오는 동시에, 자력으론 어찌할 도리 없는 운명적인 성격도 띠는 것이다. 베리만은 초침 없는 시계를 현실에 대입함으로써 꿈의 계시적 성격을 분명히 했다. 그 계시적 영역에서 인간이 할 수 있는 일은 다시 말하건대 별 없다. 이삭이 시계를 멍한 듯, 한편으로 집중해서 바라본 ‘로우 앵글’ 장면은 꿈과 인간의 무력적인 관계를 구현해낸 것이다.


      무력감에 대한 논의는 신을 둘러싼 물음으로 이어진다. 식사 자리에서 빅또르가 이삭에게 신을 믿느냐고 물었을 때, 이삭이 노랫말로 갈음한 것은 자력만으론 답을 할 수 없어서인지도 모른다. 신에 대한 논의는 꿈과 인간의 관계, 꿈의 원형을 한층 고민하게 한다. 인간에게는 꿈이 신처럼 미지의 영역이다. 따라서 신의 믿음에 관한 빅또르와 안데쉬의 논쟁은 신 그 자체뿐 아니라 서사의 배경이 되는 꿈을 다시금 짚게 해준다는 점에서 헛된 게 아닐 것이다. 유사성의 주제로 논의를 증폭시키는 것은 서사의 맥락을 테트리스처럼 튼튼하게 쌓아간다는 점에서 <산딸기>가 보이는 미덕이다.


      이제 최종 행선지 룬드만을 남겨뒀다. 차에서 이삭은 악몽을 꾼다. 앉아있는 사라가 거울을 이삭에게 내보인다. 사라는 이삭에게 거울을 주시하라 요구한다. 거울엔 주름 진 노년의 이삭이 비춰질 뿐이다. 사라는 “난 네 동생 시그프릿과 결혼해”라고 말한다. 고통이 배가되고, 잠시 침잠해있던 고통이 다시 떠오르는 순간이다. 사라는 시그브릿의 아이를 돌봐야 한다면서 자리를 떠난다. 꿈은 연상의 시각화이다. 시그브릿의 아들 얘기를 어머니로부터 들었던 이삭은 사라를 생각했을 것이다. 꿈은 어떤 기제를 강화하는 동인이다. 이삭은 마음이 아프다고 하지만, 사라가 시그브릿의 아들을 돌봤다는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고통을 되새김질함으로써 망각을 막는 것이 꿈의 기능이기도 하다. 이삭은 시그브릿과 키스를 하는 사라를 멀리서 바라볼 뿐이다. 고통은 이것으로 멈추지 않는다. 학교 졸업 시험이 악몽으로 재현되고, 부인 카린이 간음을 했던 당시 상황이 다시금 펼쳐진다.


      “이삭의 말은 진심으로 하는 게 아니에요. 그는 정말 차가운 사람이에요.” 이 세상에 없는 카린이 간음 직후 뱉은 말은 단호하다. 이삭의 말에는 동정과 연민, 구호의 의식이 있으나 이 말을 받아들이는 카린은 말의 속살을 바라본 것이다. 카린의 이 말은 고통이 가중되는 악몽에서 결정타를 날린다. 어쩌면 서사 가운데 이삭에 있어 꿈에서 느껴지는 고통이 절정에 다다른 순간이라 할 수 있다. 사라가 내보인 거울과의 대면이 외형을 보는 과정이었다면, 카라의 간음과 그 이후를 바라보는 것은 이삭의 속살을 꿰뚫는 작업이다. 베리만은 이 둘을 꿈의 서막과 결말에 집어넣음으로써 인간의 겉과 안을 들여다본다. 그 꿈을 헤집어나갔던 이삭은 노년의 주름진 얼굴을 파릇파릇한 사라의 얼굴과 대비되어 느껴지는 착잡함 그 이상의 고통을 육화하는 데 이른다. 박식함과 명예 같은 외피로 추어올려지는 게 아니라 인간과의 관계를 직시하는 데서 비롯되는 쓰라림이었다.


      상처에는 자연적으로 회복되는 것이 있고, 약이 투여되어야 아무는 게 있다. 후자의 상처는 전자보다 크기도 크고, 깊을 것이다. 악몽이 반복되는 이삭에게 마음의 상처는 절로 낫는 게 아니다. 홀로 삭여 풀어질 무엇이 아니다. 고통만 배가시켜선 효익이 없다. 고통에 따른 깨달음이 있어야 한다. 베리만은 다시금 고통의 강도를 이완시킨다. 종전 ‘부정 일색’을 삼갔던 방식과 유사하다. 이삭 옆에는 마리안이 있다. 마리안에게도 속상한 게 있다. 이삭의 아들 에발드(거너 본스트랜드) 사이에서 아이를 임신했지만 에발드는 “이런 불합리한 세상에 태어나는 건 불행한 일”이라며 지울 것을 종용한다. 에발드는 “불행한 부부 사이에서 원치 않은 아이로 태어났다”고 말한다. 마리안은 에발드의 의사는 알면서도, 요구에 응할 수 없다. 마리안은 이런 사실을 이삭에게 알린다. 속감정을 드러낸 것이다. 밝힌다는 건 연대의 의미가 있다. 이것은 변화의 신호다. 이삭의 감정과 마리안의 감정이 포개지면서 위로의 기류가 흐른다. 고통이 절정으로 치닫던 시점에 베리만은 위안의 감정을 선사한다. 상처에는 연고가 발라지고, 앞으로 재기할 여지가 생긴다. 악화일로로만 진행되는 서사를 지양하는 것은 서사의 다른 원동력이다. 베리만은 그것을 꿈, 환영과 현실의 교차, 회상과 현실의 교유를 통해 이뤄냈다. 사라와 빅또르, 안데쉬가 꽃을 이삭에게 준 뒤 이삭 주변이 암전되는 짧은 상황은 이삭이 독백에 빠져들면서 모종의 깨닫는 걸 나타낸 것만 같다. 이삭을 감싸던 학식과 명예뿐 아니라 진정성과 사랑 같은 또 다른 가치의 소중함을 인식하는 것 말이다.


      마침내 룬드에 온 이삭과 마리안은 에발드 집에 도착한다. 마리안은 미소를 짓고, 에발드는 “뜻밖에 당신을 보니 반갑다”며 화답한다. 식은 성공적으로 마쳤고, 이삭은 취침에 앞서 가정부 와그다 부인에게 미안했다고 말한다. 변곡점을 지나 변화의 물줄기에 이삭네가 올라탄 것이다. 사라와 두 청년은 “함부르크 갈 차를 구했다”며 이삭에게 노래를 선사한다. 사라는 “박사님, 사랑해요. 오늘도 내일도 영원히요”라며 작별 인사를 건넨다. 청년 시절 사라는 이삭을 떠났고, 오늘 만난 사라도 결국엔 떠났다. 그러나 오늘 만난 사라에게서 영원한 사랑이란 말을 들었다. 그 말을 통한 헤어짐은 말의 불멸성을 불러온다. 최소한 사랑을 번복하는 행위나 말은 접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시공간이 분리된 사랑이 완전한 것이냐는 의문이 따른다. 이삭의 얼굴에 행복감이 무뎌져 보이는 이유일 것이다. 서사는 변화의 변곡점을 지났지만 급상승도, 급강하도 하지 않는다. 한계를 안고, 삶의 고뇌를 기꺼이 이어간다. 이 단순해 보이는 장면들은 인물의 말과 표정을 통해 복잡성을 함축한 장면으로 거듭났다. 이삭 역을 맡았던 빅터 소스트롬의 연기와 배우의 가치가 전달되는 순간이다. 


      이삭은 침대에 누워 “근심이나 슬픔이 있을 때마다 회상하는 게 있다”며 다시 과거를 불러온다. 사라의 인도로 간 저편에 아버지와 어머니가 보인다. 낚시질을 하던 아버지가 이삭에게 손을 흔든다. 이삭의 눈엔 눈가가 맺히고, 아직 눈을 감지 않은 이삭을 응시하던 영화는 끝을 맺는다. 아련한 추억을 불러내면서 잠깐의 행복에 도취하지만 결국엔 맺히는 눈물처럼 미완의 과제를 남긴다. 이삭은 식중에 “하루 동안 우연처럼 보이는 일련의 일들이 놀라운 인과 관계를 도출해낼 것”이라고 생각했다. 일들이 중첩되면서 변화를 도출했지만 쌓아올려진 회한과 변화의 연속성에 대한 고민은 순도 100%의 행복을 낳지 않는다. <산딸기>의 엔딩이 마냥 ‘해피엔딩’으로 점철됐다면 삶 자체를 간과한 게 됐을 것이다. 꿈과 회상, 사라와 판박이인 또 다른 사라는 영화의 리얼리즘적 요소를 줄였지만 서사의 이완과 순도가 낮은 결말은 리얼리즘을 강화시켰다. 어쩌면 사라를 빼면 꿈과 회상이라는 우회적 통로를 활용해 리얼리즘을 한층 높였는지도 모른다. 이것은 상황에 대한 감정의 이입을 낳고, 삶의 다층성을 관조하는 효과를 낳았다.


      <산딸기>는 분명한 것을 지양했다. 대신 모호함을 통해 역설적이게도 삶의 진실함을 드러내주었다. 진정성, 그리고 진실하다는 것이 반드시 분명함에서 비롯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일깨운 영화다. 진실에 담긴 층위만큼이나 때로는 암시적 요인과 모호성이 필요하다. <산딸기>에 담긴 이삭의 하루 동안의 여정은 그런 기반 위에 나를, 관객을 반추하게 하는 효과를 가져왔다. 더불어 <산딸기>가 담아낸 서사의 여정은 롤러코스터가 상승, 하강하듯 인생의 궤적을 압축시켰다. 얼핏 간단해 보이는 장면들에 이런 깊이가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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