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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의 영화 <컨버세이션> - 자유와 부자유, 역설과 촬영 구도를 중심으로
    영화 2018. 9. 30. 14:09

      자유는 또 다른 부자유를 양산한다. 자유의 확장은 다른 이의 자유를 중첩시키고, 침해의 경우를 빚곤 한다. 그래서 자유주의에서조차 당위는 ‘자유’에 있지만 핵심은 자유의 견제를 통한 재산권과 기본권의 인정에 있다. 자유는 자유로 이뤄지는 게 아니라 견제로 이뤄질 수 있음을 방증하는 것이라 볼 수 있다. 굳이 사상적 뿌리에 자유의 연원을 찾지 않더라도, 견제가 없는 자유는 필시 자유의 악화를 불러온다는 걸 우리는 인식하고 있다. 예컨대 관음적 시선을 보내는 경우, 이를 행동하는 사람은 ‘볼거리’의 자유를 추구하는 것이지만 시선의 대상이 되는 사람은 불안감과 행동의 제약을 느끼게 된다. 자유의 확장은 역설적이게도 자유의 총합이 확장되는 게 아니라 특정 누군가의 전유물로 쓰일 소지가 있는 것이다.


      이는 규범과 제도 수립을 통한 자유의 억제를 추구하려는 합의가 사회 내부에 암묵적으로 통용되는 배경이라 할 수 있다. 그러나 자유의 확장에 대한 갈망은 때로 규범과 제도가 닿지 않는 영역으로 나아간다. 규범과 제도는 적용의 폭과 대상이 인간이 갈망하는 것만큼 넓지 못하다. 갈망의 결과가 때로 부정적일 수 있다는 걸 인간은 짐작하면서도 이를 추구하려는 인간의 욕망은 근원적이다. 성경에서 신의 경고에도 아담과 하와가 선악과를 따먹었듯, 인간의 호기심과 금단을 넘으려는 욕망은 원초적이다. <대부>를 감독한 프란시스 포드 코폴라 감독의 영화 <컨버세이션>(1974)은 ‘도청’을 통해 자유와 부자유, 그리고 자본이 결합된 인간의 모순적 행동을 탐구하는 작품이다. 도청은 관음적 시선을 기술의 영역으로 확장한 것으로, 인간의 진화된 욕망이 투영된 것이다. 과거 돈과 인정 욕구, 사회적 지위에 욕망이 분포했다면 기술적 진화는 욕망의 영역을 확장하고, 도청이란 방법을 만들었다. 


      영화는 샌프란시스코의 한 광장을 멀리서 ‘줌인’하는 것으로 시작한다. 광장의 인파를 관조하는 게 아니라 특정인을 향해 시선이 움직인다. 관객은 그 특정인이 누구일지 알 수 없다. 고도를 활용한 시선의 움직임과 초점은 ‘감시 사회’의 근대적 표현이자 탐색 대상을 고르는 우월감의 발로처럼 느껴진다. 카메라의 시선은 한 중년 남성에 쏠린다. 중년 남성은 자신이 시선의 대상이 된 것도 모른 채 뚜벅뚜벅 걷는다. 대부분 영화적 특성에서 극의 인물이 카메라의 대상이 된다는 점을 인식하지 못하는 점을 활용, 영화는 시작부를 통해 카메라의 시선을 감시의 인상을 주는 시선과 포개는 전략을 구사한다. 서두부터 카메라 구도를 통해 서사를 전달하려는 움직임을 보인 것이다. 이내 장면이 전환되고, 실제 감시 대상이 등장한다. 광장을 걷는 남녀 두 사람이다. 두 사람의 말은 일거수일투족 기록된다. 두 사람을 바라보던 아까의 그 중년 남성은 자리를 떠 인근에 주차된 벤에 탑승한다. 벤 안에선 남녀의 얘기를 시시각각 도청하고 있다. 멀찌감치 카메라의 대상이 됐던 중년 남성은 다름 아닌 남녀를 도청하는 일을 맡은 해리 콜(진 핵크만)이다.


      시작부의 카메라 시선은 벗어날 수 없는 감시 사슬의 상단을 보여준 것만 같다. 카메라를 결코 인식할 수가 없었던 중년 남성 해리의 모습이 그렇다. 영화적 특성은 결국 관찰이고, 관찰은 감시와 관음과 맞닿아 있다. <컨버세이션>은 이 점을 십분 활용했다. 영화의 카메라이기는 하지만, 관찰이 되는 대상이 도청을 하는 이 모순적 상황은 오로지 카메라의 시선으로만 구현될 수 있는 것이다. 광장에서 일상적 얘기를 나누는 것만 같던 남녀가 어떻게 도청 대상이 된 건지 동료는 궁금해 하나, 해리는 “녹음이나 잘 됐으면 한다”며 눙친다. 이 날 도청은 끝이 나고, 다음날 해리는 도청의 내용을 분석하는 자신만의 일터로 간다. 광장의 남녀를 도청한 녹음이 일터의 기계를 타고 재생된다. “크리스마스 때 받을 게 뭐 있겠어요.” 해리는 문장의 어절과 단어에 짐짓 알아야 할 맥락이 있을까 재생을 반복한다. 남녀의 목소리는 반복해서 울려 퍼진다. “이런 사람을 볼 때마다 같은 생각이 들어요.” 


      녹음은 상황을 다시금 시각화하며, 기록된 것으로써 맥락을 되짚게 한다. 녹음을 분석하고 재생하는 기계들이 늘어서 있는 해리의 일터는 기억을 고착화하는 공간이다. 기억은 연상을 매개하고, 때로 여운을 남긴다. 그것이 영화가 전개하는 데 줄기가 된다. 줄기의 확장을 북돋는 영화의 카메라 구도는 ‘감시’로 이뤄져 있다. 핸드헬드식 촬영 기법을 배제한 코폴라 감독은 일상의 ‘줌인’을 통해 ‘도촬’의 방식을 시선에 녹여냈다. 해리가 일하는 이 일터 또한 멀리서 관찰하거나 어디선가 도촬하는 뉘앙스를 주는 시선으로 장면이 담겨진다. 이러한 구도의 접근 방식은 영화에서 일관적이고, 마치 현대인은 감시에서 벗어나기 어렵다는 메시지를 은연 가운데 증폭시키는 것만 같다. ‘도청 전문가’ 해리도 감시에서 예외가 아니라는 것을 분명히 하면서.


      해리는 이날 밤 연인을 만난다. 해리는 연인에게도 나이와 생일을 비롯한 자신의 존재를 숨긴다. “당신을 알고 싶다”는 연인의 말에 해리는 “그런 질문, 대답하기 싫다”고 말한다. 도청을 하면서도 정작 본인은 숨기는 역설적 상황을 빚고 있는 셈이다. 영화는 종전 카메라가 선보였던 역설적 장면을 대화를 통해 역설적 상황으로 이끌어낸다. 역설은 뫼비우스의 띠처럼 돌고 돈다. 도청의 주체는 정작 도청의 대상이 되지 않길 바라며, 그리고 본인의 신분이 탈로나지 않길 바라는 인생의 역설을 끊지 못하고 있다. 도청과 감시는 그것 자체가 역설을 낳는다는 걸 영화는 밝히고 있다. 연인과 헤어진 해리는 버스 안에서 도청을 당한 남녀가 키스하는 순간을 떠올린다. 연인과 키스 한 번 마음 편히 못하고 헤어졌던 해리와 대비되는 모습이 포개진다. 도청을 당하는 대상과 도청을 하는 주체의 자유를 영화는 반문한다. 자유라고 생각했던 것이 어느덧 부자유가 되는 순간을 장면의 대비로 이뤄낸 것이다.


      해리는 앞서 녹음이나 잘 되면 좋겠다고 말했지만 어느덧 기억의 연상 작용을 통해 남녀에게 감정을 이입한다. 해리가 현금 5만 달러를 마다하고, 도청 테이프를 회사 사장에 넘기지 않은 배경이다. 급기야 회사에서 도청의 대상인 남녀를 차례로 본 해리는 당혹감을 숨기지 못한다. 해리의 생각은 이렇다. 회사 사장이 남녀를 도청해라 지시했으니, 이 남녀는 결국에 화를 당하지 않겠느냐고. 해리은 자신의 일터에서 도청을 분석하려 녹음 내용을 다시금 반복한다. 그래서 발견하게 된 한마디. “우리를 죽이려 할 거야.”해리는 남녀가 다치는 걸 두려워한다. 도청의 내용을 분석하면 할수록 옭아매어지는 쪽은 해리이다. 뒷조사 이후의 일은 자신의 책임으로 인식하지 않았던 해리는 인간의 본성 가운데 일부라 할 수 있는 사랑과 도덕에 대한 의무감이 연계되면서 공포와 불안의 감정을 낳고, 도청이란 자유의 행동이 부자유로 파생되는 아이러니한 상황을 빚어내고 있는 것이다.


      영화는 점층적 심화로 진행된다. 코폴라 감독은 ‘점프컷’ 같은 방식을 최대한 배제하면서 ‘다큐멘터리’의 인상을 남긴다. 점층적 심화는 교훈적 인상을 남기기에 좋은 구성이다. 행동과 깨달음, 이와 얽힌 맥락은 단숨에 전달할 수 있는 것도 아니며, 상황이 점증되지 않고선 부자연스럽게 전달되기 마련이다. 이어 전개되는 도청 장비 전시장과 그 이후의 과정은 점층적 심화로 무언가를 구현해내려는 감독의 의도가 읽히는 부분이다. 전시장은 사람들과 기계들로 북적인다. 무언가를 더 알고 싶은 욕망, 자기 안위를 확보하려는 열망이 얽혀 장비의 진보를 배태했다. 그러나 각양각색의 전시장을 기어이 비춘 영화는 전시장 속 해리의 불안한 모습을 지켜보면서 욕망과 열망의 과정과 끝이 그리 간단하지 않음을 내보인다. 해리는 도청으로 일을 하는 동료들과 전시장에서 만나 자신의 일터에서 술을 마신다. 그곳에서 한 여성에게 헤어졌던 연인에 대한 그리움을 말한다. 자신의 숨김을 통해 좌절된 사랑은 애틋함을 키우고, 이것이 도청을 당한 남녀에게 감정이입으로 작용하는, 그들의 사랑은 지켜졌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가지게 됐는지도 모른다.


      해리의 심경에 자극이 이어지는데, 동료는 해리가 대통령과 회계사 대화를 도청한 것으로 세 명의 목숨을 앗아갔다고 말한다. 회계사 부인과 자식은 강간을 당했고, 이에 대해 해리는 애써 도청 사후의 일에 대한 책임을 부인하려 하지만 표정은 어둡다. 해리가 도청 기계의 탁월한 성능을 읊으며 대단한 일이라 치켜세우지만 대단함이 함축하는 바는 기술의 진보다. 그것은 ‘대단함’이란 미명으로 확장을 거듭할 것이며, 다른 걸 고려하지 않는 ‘대단함’은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영화는 해리의 외양으로 묘사하고 있다. 확장의 동인은 자본인데, 동료는 해리와 힘을 합치면 벼락부자가 될 것이라 호언한다. 자본과 기술, 욕망과 열정이 똬리를 틀면서 모아지는 한 지점, 도청이 직시하는 현실은 그리 유쾌하지 않다. 인간들이 그것들을 만들어내고, 파생하고 합일을 이뤘지만 또 다른 구석에선 불안과 증오를 증폭시키는 일이었다. 이성주의의 집약이라 할 만한 도청의 민낯은 이성에 대한 경종을 울리는 것이다. 영화가 구성하는 대화, 장면의 대비, 인물의 연기는 바로 이 지점에서 이뤄지고 있다. 그렇다고 이야기가 반이성주의로 흐르는 건 아니다. 이성주의의 반대급부, 그것의 폐해를 조망하려 하면서 영화는 일견 균형을 추구한다.


      해리는 동료의 장난으로 도청을 당했다는 사실에 분개하고, 일터에서 같이 왔던 여성과 잠에 든다. 이윽고 꿈이 펼쳐지는데, 꿈의 인물은 도청을 당한 여성이다. 해리는 왼쪽 다리를 못 써 잘 못 걷는다고 말하더니 살인이 두렵다고 한다. 여성은 그런 해리를 바라볼 뿐이다. 위험의 대상이 됐다는 사실을 알리고 싶지만 여성은 묵묵부답이다. 이내 도청 녹음에서 나왔던 호텔의 객실에서 여성이 살해된다. 도청의 후과에 대한 죄책감은 꿈을 움텄고, 급기야 여성이 살해되는 꿈으로 이어졌다. 어느덧 강박 증세까지 보이는 해리의 상황을 대변하고 있는 건 꿈이란 장치다. 대개 현실에 대한 억압과 걱정에서 벗어나고픈 심적 상황이 꿈으로 발현되곤 한다. 어느덧 점층적인 구성이 클라이맥스로 향해가고 있다는 걸 보여주는 증표이기도 하다. 꿈에서 깨보니 테이프는 함께 잔 여성에 의해 사장 손에 넘어가고, 해리는 남녀의 안위가 걱정되지만 사장이 대가로 준 돈은 또 받는다. 돈을 세보는 해리의 모습은 다시금 모순적 상황을 자아낸다. 해리가 남녀를 걱정하게 된 단초는 도청이었지만 정작 그것은 해리의 생계를 떠받치는 기둥이다. 자본과 기술의 교환, 그로 인해 맞닥뜨리는 모순은 서사의 원인이자 배경이 되고 있다. 죄책감과 별개로 해리가 도청이란 행위를 단칼에 무를지는 미지수다. 자신의 행위에 대해 책임의 상한선을 스스로 정하며 애써 합리화해왔기 때문이다. 여기서 돈의 제공, 자본의 매개가 없었다면 합리화를 하지는 않았을 것이다. 이 모호함의 해리는 사회와 현대인이 공유하는 모호함이기도 하다. 생계로, 당장의 안위로 생각과 행동이 상충되는 모호함 말이다.


      해리는 문제의 호텔 객실 옆방을 잡았다. 거기서 도청에서 언급된 773호실을 엿듣는다. 이윽고 비명소리가 전해지더니 베란다에서 무언가에 찔려 낭자해진 피가 투영된 걸 목격하고, 소스라친다. 심리적인 부분을 확실히 매듭을 짓지 못하고, 돈과, 자신의 당위와 사람을 살려내야 되겠다는 의무감 사이에 갈팡질팡하던 지점에서 결국 사고는 벌어진 것이다. 해리는 이불을 싸매고 괴로워한다. 그러나 신고는 하지 않는다. 신고는 내 신상이 탄로 나는 것과 연관된 행위다. 할 수 있는 것은 신음을 내며 괴로워하는 것이다. 이는 위태위태하던 모순적 상황의 결말이 어떠한지를 명징하게 드러내는 장면이다. 이 장면이 40년이 지난 지금도 작위적으로 다가오지 않는 것은 모순적 상황의 해결이 그만큼 어려워진 시대에 우리가 살고 있기 때문이다. 영화는 구도와 구성을 통해서, 배우의 연기와 행동을 통해서 이 모순적 상황을 점층적으로 증폭시켜왔다. 모순적 상황은 도청에만 국한하지 않는다. 도청은 이 모순을 끌어내기 위한 도구이며, 물론 이 영화의 핵심이기도 하다. 핵심은 자유와 부자유의 물음과 이어지며 이 역시 모순적 상황과 맞닿아 있다. 영화는 여기에 생명의 위협이라는 서스펜스적 요소를 집어넣음으로써 점층적인 진행의 단계를 마련했고, 비극을 유도했다.


      시간이 흘러 해리는 사건이 일어난 773호실에 들어간다. 방은 이미 깔끔하다. 그러나 변기의 물을 내려 보니 물이 들어가는 게 아니고 핏물이 솟구친다. 살인을 은폐한 것이다. 해리로서 허탈감을 자아내는 건 살인된 대상이 여성이 아니고 사장이었다는 점이다. 살인은 사고사로 위장되고, 도청의 대상이었던 남녀가 회사를 이끄는 부조리가 완성됐다. 테이프를 사장에게 건네던 회사의 중책은 남녀를 동행하는 것으로 봐선 ‘한통속’이었던 걸로 보인다. 해리가 생각했던 남녀는 어디까지나 망상에 불과했다. 해리가 한 도청의 내용으로 사장은 문제의 호텔 객실로 갔고, 거기서 무참히 살해됐다. 여성은 사장의 남편이었고, 도청의 남자는 여성의 내연남이었다. 고도의 노림수로 해리는 농락을 당한 셈이다. 영화는 반전을 후반부에 집어넣어 점층적 상황의 절정을 유도해냈지만 이것은 도청을 필두로 갖가지 욕망이 개입된 기술의 결과가 어떠한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것이다. 


      서사에 소름을 가져오는 것은 누군가를 속인다는 것의 고리 체계다. 해리는 대상을 속여 도청을 했고, 그 대상에 의해 속임을 당한 셈이 됐다. 그 고리를 해리의 자력으로 깰 수 없다는 게 문제다. 해리가 도청 일을 그만 뒀더라도 다른 누군가에 의해 같은 일이 빚어졌을 것이다. 남녀와 사장 사이에 의심이 증폭하던 상황에서 이를 해결해 줄 기술적 유인의 호기심을 사장이 결단코 끊을 수 있느냐는 물음을 던질 수밖에 없다. 영화는 마지막 반전을 통해 이 서슬 퍼런 고리를 밝힌 셈이 됐다. 고리는 끊이지 않고, 인간의 자생적인 욕망과 더불어 기술과 자본이 엮이면서 강화된다. 이 점에서 해리가 마지막에 속은 것은 필연이라 할 수 있으며, 악기로 음악을 연주하는 건 이 고리에 대한 자포자기의 태도를 드러낸 것이라 할 수 있다. 그런데 그 고리는 은연중에 진행된다. 반전이 은연중에 쌓이다 마지막에 이뤄진 것처럼 고리는 공공연하지 않고 비밀로 있다. 이것이 사회를 관통하고 있는 불신의 핵심, 신뢰 사회가 요원한 배경일지 모른다. <컨버세이션>은 단순한 서사 차원을 넘어서 이러한 사회의 맥락을 짚은 것이다.


      영화는 마지막 반전으로 서사를 종결하지 않는다. 해리에게 전화가 온다. “다 알고 있겠지만 이 일에 관여하지 마시오. 지켜보고 있으니까.” 입 다물고 있으라는 압박이다. 도청 전문가로서 지켜보고 있다는 게 어떤 함의를 가진다는 건지 해리는 안다. 말하지 말라는 건 비밀의 영속을 의미하고, 그 오랜 기간 감시를 받게 된다는 걸 의미한다. 해리는 두려움에 도청 감지 장치로 집안을 헤집고, 커튼을 걷어내며, 천장의 등을 떼어낸다. 집안의 온갖 것을 살피지만 도청 장치는 발견되지 않는다. 급기야 성모마리아상까지 부수고 내용물을 들여다본다. 두려움이 광적으로 변하는 순간이며, 그 두려움은 지난날 도청을 해오며 축적한 것이기도 하다. 벽지를 떼어내고, 집안의 구조물까지 건드리지만 말짱 허사다. 이 순간 도청의 대상이 됐던 남녀의 키스 장면이 다시금 출현하는데, 연인과의 헤어짐 이후 해리를 비췄을 때처럼 자유와 부자유의 역설적인 상황을 또 한 번 드러낸 것이다.


      이미 서두에서 해리는 카메라의 시선을 통한 것이지만 자신이 시선의 관찰에서 벗어날 수 없는 영화적 특성에 포획된 것임을 살폈다. 영화는 이와 수미상관을 이루듯, 감시에서 영영 벗어날 수 없는 모습을 카메라의 시선과 결합하여 마지막을 그려내고 있다. 서두와 마지막의 카메라는 단지 관객으로 시선을 인도하는 차원이 아니다. 결코 잡아낼 수 없는, 벗어나기 어려운 감시 사회의 단면을 그려낸 것이다. 도청 장치를 찾으려 벽체를 뜯고, 집안이 아수라장을 만든 해리는 자포자기로 다시 음악을 연주한다. 음악으로 평온을 갈급하지만 어디까지나 일시적이며, 자포자기는 이윽고 공포를 일으키는 동인이다. 이를 카메라는 CCTV 감시 카메라로 촬영하듯, 상단에서 좌우 연속적으로 훑는다. 해리는 이 카메라를 앞으로도 발견할 수 없을 것이다. <컨버세이션>은 서사의 구성뿐 아니라 인물의 연기, 외양, 대화와 더불어 촬영 기법을 결합하여 우리가 영영 풀려나기 어려운 감시 사회를 짚은 작품이다. <컨버세이션>의 상황은 오늘날에도 맞아 들어가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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