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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영화 <나라야마부시코>,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의 ‘힘’을 어디에(2017,10 과제 제출용)
    생각/영화 2018. 1. 28. 23:27

      자연은 만고불변의 법칙으로 순환한다. 봄이 생동하고 장렬한 여름이 찾아오고, 한기가 슬며시 느껴지는 가을이 오더니 추위가 온몸을 가로지르는 겨울이 온다. 이것은 인간의 의지로 변환이 가능한 게 아니다. 자연의 섭리는 생물종의 그 누구도 거스를 수 없다. 인간은 순환하는 자연에 순종할 뿐이다. 거대한 체계 아래 무력함만이 엄습하는 것처럼. 그 체계를 벗어날 수 없는 인간이 영위할 방법은 일단 사는 것이다. 죽는 것도 알아야 죽는다. 그런데 살기 위해선 먹을 게 필요하다. 먹는 행위와 먹을 것을 구하는 건 인간의 몫이다. 자연은 여기에 보조를 할 뿐이다. 


      먹는다는 건 인간이 보유한 가장 원초적 욕구다. 이 욕구에 자유로울 인간은 없다. 영화 <나라야마부시코>는 먹는다는 ‘근원적 행위’부터 인간의 욕구를 고찰한다. 욕구엔 먹을 것만 있지 않을 터. 먹고 나면 생각을 하게 되고, 여러 욕망을 꽃 피워나가는 게 인간이다. 일단 먹고 난 뒤에 잉태해가는 인간의 욕망과 이후 여러 갈래로 나눠지는 욕망을 영화는 작위적 장치의 도입을 최대한 배제하고 사실주의로 그려낸다. 그 사실주의란 인간에만 오롯이 맞춰진 날 것이 아니요 인간과 자연이 합일된 것이다.




    욕망의 날 것, 무절제의 결과


      영화의 시대는 19세기, 에도 시대 말기. 산자락 새하얀 백설 위, 촌락이 있다. 세한 바람이 몰아치는 겨울, 당장 먹을 게 막막하다. 원초적 욕구를 채우려는 촌락 사람들은 굶주림에 태어난 사내아이를 논에 버리고, 여자 아이를 소금장수에 판다. 그러면서 아이를 낳기 위한 작업(?)은 서슴없이 한다. 윤리적인 개념은 미약하고, 욕구에 보다 충실한 촌락의 광경을 보여준 것이다.


      영화는 인간의 욕구를 자연에 빗댄다. 남녀가 관계를 맺으면 뱀 두 마리가 맞닿아 꼬는 걸 비추고, 사마귀 암컷과 수컷이 만나는 장면이 이어진다. 인간의 행위는 자연의 일부분일 뿐이라는 점을 상기하듯, 영화는 행위의 과장을 경계하되 보는 관객으로 하여금 겸손함을 부른다. 자못 겸손해지는 건 종전 인간을 향한 관념을 버리고, 있는 그대로 인간을 바라보자는 영화의 의도가 느껴지기 때문이다. 어떠한 허위 의식이나 작위는 버려두고, 인간의 욕망을 자연의 한 가운데 스스럼없이 내보이자는 영화의 의도가 엿보인다. 


      자연엔 꽃과 나무와 같은 물리적인 발현뿐 아니라 인간의 생리를 추동하는 배경이 있을 것이다. 리스케는 정욕을 어찌하지 못해 개와 관계를 맺는 탈선을 벌이더니, 정욕을 풀어보려 다방면으로 애쓴다. 이것 역시 인간이 발산하는 원초적 욕구이자 욕구가 배태하려는 자연스런 현상에 인간이 몸을 내맡긴 뒤, 욕구의 절제라곤 찾아보기 어려운 상황을 빚어내는 것이다. 심지어 촌락의 한 여인은 남정네와 잠자리를 가지라는 유지를 받들어, 동네 남성들과 관계를 마다하지 않는다. 욕망의 발현을 해소하는 과정은 원시적이기만 하다.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 어디로 향해야 하는가


      그 원시성은 물론 정욕의 발산에 머무르지 않는다. 촌락의 군상은 인간이 내보이는 욕망의 재현이자 총합이다. 촌락에서 70세가 되면 이른바 ‘고려장’처럼 가족 품을 떠나, 나라야마 산으로 가서 죽음을 맞이해야 한다. 나이든 이가 산으로 가는 데는 주민들이 생산적 활동에서 뒤처지는 노인을 배제하고, 먹을 걸 최대한 구비해놓겠다는 원초적 욕망이 깃들어있다. 


      쇠약해진 노인은 식량을 축내는 구성원으로 전락하고, 노인 역시 보릿고개를 지내야 하는 구성원들에게 폐를 끼치진 않을까 싶어 ‘나라야마산’행을 택한다. 먹는다는 가장 근원적 욕구의 생산과 이 생산에 골몰하면서 생기는 문제에 대한 윤리적인 고민은 미약한 상황에서, 노인의 버림이 당연시됐던 것이다. 


      사실, 인간이 다른 가치보다 욕구에만 주력하는 양상을 벌인다면 이성적 힘이 부족한 동식물의 약육강식 세계,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닌 게 벌어질 것이다. 영화에서도 식량을 탐내는 거주민을 매몰차게 묻어버리는 모습을 비춘다. ‘욕망의 실현’이란 명제 앞에 관용과 인내, 더불어 좀 살아보자는 희망과 ‘윤리적’ 고민은 꺾여버리고 마는 것이다. 그리하여 욕망들이 배태하고, 해소하려는 촌락의 광경은 과거 다소 무자비했던 인류를 반추해보는 기회인 동시에, 이성을 갖춘 인간이 어찌 동종의 인간을 배제하기도 하고, 매몰차기도 하는지 그 연원의 실마리를 던져준다.


      어쩌면 ‘욕망의 발산’에만 초점을 맞추는 일부 구성원들에 의해 지금도 에도시대의 촌락이 보여준 인간의 동태와 크게 다르지 않은 사회가 빚어지고 있는지 모른다. 욕망의 형성이 자연스런 과정이라 하더라도, 욕망의 절제와 함께 살아보려는 생각은 이성의 힘으로 만들 수 있을 것이고, 그 이성이 그나마 인간 사회를 안전하고 풍요롭게 만들어주는 동력이 되어줬을 것이다. 허나 이상보다는 발산에만 초점을 맞출 경우, 인간과 인간 사회를 파멸로 치닫게 한다는 걸 상기할 수밖에 없다. 


      타츠헤이는 오린을 나가야마 산에 두고 하산하며, 회한에 젖어든다. 자연의 열약한 조건이 보릿고개를 낳고, 욕망의 배태를 방조했을지라도 인간의 이성이 그나마 회한을 낳은 것이다. 사회에 지금도 잔존하는 ‘적자생존’에서 인간이 조금이라도 탈피하려면, ‘각자도생’이 아니라 함께 손을 맞잡고 앞으로 나아갈 궁리를 하려면, 인간에게 부여된 이성을 각별히 여기고 이성의 방향을 어디로 틀어 나아갈 것인지 고민해야 할 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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