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박광수 감독 연구(2) ‘미학’ 청년에서 ‘영화인’으로영화 2020. 3. 19. 21:51
박광수는 강원도 속초에서 1955년 1월 22일에 출생하여 중학교 때까지 속초에서 자랐다. 이후 부산으로 상경, 고등학교를 다니면서 ‘미학’에 눈을 뜬 박광수는 미술반에서 활동을 하다가 백남준과 앤디워홀에 관심을 가지고, 철학에도 관심을 기울인다. 그리하여 1976년 서울대 조소과에 입학한 박광수는 대중과 소통하는 방식에서 미술에 회의를 느끼고, 대중과 커뮤니케이션을 하는 데 영화가 매력적이라고 판단, 영화에 본격 발을 들인다. 시작은 1979년 ‘얄랴셩’이었다. ‘얄랴셩’은 서울대 공대 안에 생긴 자그마한 서클이었다. 1970년대 탈춤과 마당극이 대학생의 의식을 대변했다면, 1980년대는 비교적 주류 대중문화로 취급받던 영화가 그 자리를 대신하려 했다. 이 전환점에서 박광수는 영화에 길을 들이게 된 것이다. 박광수는 서울대 공대가 관악캠퍼스로 이전한 뒤 전교 서클로 자리매김한 ‘얄랴셩’에 1980년 가입한다. 이 무렵 박광수뿐 아니라 김홍준, 황규덕 등이 가입했고, 여기서 일 년 여간 8mm로 여덟 개의 작품을 만든다. 특히 1980년 5월 이후 함께 자취하던 미학과 학생의 자살은 박광수를 영화에 더욱 심취하는 계기가 된다. 홀로 미술 작업에 매진하면 자신도 자살할 우려를 배제할 수 없었고, 함께 하는 영화 제작에 집중했던 것이다.
박광수는 이때를 “영화작업을 해보니 굉장히 재밌었다. 연극과 미술보다 쾌감의 강도가 컸다”라고 회상한다. 이 같은 경험은 82년 졸업한 뒤 ‘서울영화집단’을 만드는 계기가 된다. ‘얄랴셩’에서 활동하던 이들이 규합해 만든 ‘서울영화집단’은 할리우드 스타일의 재현과 같은‘문화 식민지화’를 거부하고, 제3세계 영화 운동에 투신하려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1970년대 민주화 운동과 1980년 5월의 광주를 거치며 형성된 의식의 흐름이 영화 작업에 투영된 것이었다. 또 모방이 아닌 한국적 현실에 입각한 독자성을 띠려 했다는 점에서 한국 영화사에 의미 있는 작업이었다 해도 무방할 것이다.
1983년 프랑스 유학길에 오른 박광수는 ‘E.S.E.C.(영화교육특수학교)’에서 공부한다. 당시만 하더라도 영화학과 이외에 영화이론과 제작방식을 체계적으로 접하기란 국내 여건상 쉬운 게 아니었다. 차선책으로 청년들은 프랑스 문화원 혹은 독일 문화원을 찾아가 영화를 보고, 여기서 영화동호회를 결성하여 영화들을 공부해나갔던 시절이었다. 박광수는 ‘E.S.E.C’에서 시간의 절반 이상을 영화 보기에 쏟았고, 전 세계 영화 1000여 편을 보면서 영화의 사회성을 공부해나갔다. 박광수가 집중해서 본 영화는 그 중에서도 제3세계(아시아, 아프리카, 남미) 영화들이었다. 그는 당시 본 영화 중 가장 감명 깊게 본 영화로 호로헤 산히네스(볼리비아) 감독의 <여기서 꺼져라>를 꼽았다. 해당 영화는 농부들의 일상적 삶을 사실감 있게 그려낸 것으로 평가받는다. 유학 당시를 ‘제3세계’와 ‘농부’의 키워드로 회상한 박광수의 그러한 모습은 한국적 현실에 뿌리를 둔 사회적 영화를 만드는 데 배경이 되어줬을 것이라 짐작된다.
1984년 7월, 박광수는 ‘얄랴셩’ 멤버였던 김홍준과 황규덕과 함께 ‘서울영화집단’ 이름으로 제작한 영화 <판놀이 아리랑>을 단편영화제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에 내놓는다. <판놀이 아리랑>은 30여년이 지난 현재, 한국영상자료원 자료실에 비치된 비디오테이프로 잔존해있으나 화질이 고르지 못하고 장면은 투박하기 이를 데 없다. 다만 이 영화를 통해 그의 영화를 대하는 시각과 태도가 필모그래피 시작부에 어떠했는지를 유추해볼 수 있다는 점에서 간과할 것은 못 된다. 18분 남짓의 영화는 극단 연우무대의 공연 <판놀이 아리랑 고개>를 장면에 옮겨 놨다.
연우무대는 공연에 관심을 둬 연기에도 나서던 박광수가 임진택, 이상우 등 선배와 한국 사회를 고민하며 같이 활동을 하던 곳이었다. 1984년 ‘작은 영화를 지키고 싶습니다’ 자료집에서 “이 영화의 특색은 영상과 음향의 분리라는 점인데 공연 준비장 스케치-공연장-분장실-공연사진으로 이어지는 영상과 공연실황-인터뷰-연우무대 총평모임을 녹음한 음향이 결합되어 있다. 이러한 시도는 영상과 음향 간의 불일치를 통해 관객의 심리를 영화에 참여시키도록 한다는 의도로 해석된다”고 밝힌 것처럼, 영화는 관습에 기대기보단 ‘열린 자세’로 장면을 대한다. 특히 인터뷰의 내레이션을 인터뷰 대상에 포개는 게 아니라 공연실황과 겹치는 부분은 영화의 형식적 실험을 엿볼 수 있는 대목이다.
이러한 생경함은 진부함을 넘어서, 관객이 장면을 집중하는 계기가 된다. 또 무대와 객석의 경계를 허물어 공연을 본 관객의 의견을 무대의 장면에 포개면서, 공연의 ‘열린 마당’을 영화로 확장한다. 주제 의식은 ‘서울영화집단’이 추구하려던 바 대로, 한국의 토착적 현실과 맞닿아 있다. 공연엔 1930년 현실을 비추며 소작농이 분통을 터뜨리는 대목이 나오는데, 철저히 ‘을’에 위치한 소작농의 분노를 그려냄으로써 영화가 제작된 1980년대의 소외된 이와 연대의 소지를 만들어낸다. <판놀이 아리랑>을 통해 박광수는 영화적 실험과 한국적 ‘한’, 구조적 문제에서 비롯된 문제의식을 결합하여 영화를 제작하겠다는 의지를 피력한다.
이 같은 경향은 차후 박광수가 제작해나가는 영화들에 고스란히 반영된다. 85년 유학길을 마치고 귀국한 박광수의 첫 발길은 충무로 입성이었다. 그때만 하더라도 영화감독이 되려면 충무로의 ‘도제식’ 교육을 받는 게 보편적이었다. 박광수는 이장호 연출부로 들어갔다. 그들의 인연은 이전에 이장호 감독이 1980년 연출한 영화 <바람 불어 좋은 날>에서 비롯됐는데, 이 작품이 나오자 장선우가 영화감독이 되겠다며 찾아왔고 강우석 감독도 이 작품을 통해 감독이 되겠다고 마음을 굳힐 정도로 그 영향은 작지 않은 것이었다. 리얼리즘계로 분류된 <바람 불어 좋은 날>은 사회 의식적 영화로 호평을 받았다. ‘얄랴셩’ 멤버였던 김홍준은 <바람 불어 좋은 날>을 매일 볼 정도로 심취하다가, 박광수를 이장호에게 소개한다. 그렇게 인연을 맺게 된 둘은 박광수가 귀국하자 영화 제작에 의기투합한 것이다. 박광수는 이장호 감독 밑에서 <어우동>(1985), <공포의 외인구단>(1986), <나그네는 길에서도 쉬지 않는다>(1987)를 조연출한다.
참고자료
김형석, 「영화감독 박광수」, 네이버캐스트, 2009.03.24.
김진아(1996), 「충무로를 거부하며 충무로의 주역이 되다」, 월간 사회평론 길.
이성남, 「영화:박광수」, 시사저널, 1990.01.07.
배장수, 「단짝자살 계기 영화입문」, 스포츠경향, 2007.04.20.
「전태일과 함께 활활 타는 박광수 감독」, 시사저널, 1995.12.14.
독립영화 회고전 28일까지 서울아트시네마에서 열려 (사)한국독립영화협회 2004
남동철, 「한국 독립영화 회고전 - <판놀이 아리랑>외」, 한겨레, 2001.03.28.